“아빠가 음식먹을 때 교양 없이 쩝쩝대는 소리가 싫어.”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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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의 전쟁>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한번은 눈 주위가 잉크 빛으로 물들어 왔다. 나를 닮아 성격이 모가 난 아들은 친구와 싸웠던 게 틀림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극한의 경쟁에 내몰려 허덕였던 나는 아들과 딸을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시켜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었다. 삼십대 초반에 변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던 나는 가난한 아버지보다 자식을 한 단계 위로 올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조기 유학시키고 기러기 아빠를 자청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들을 보러 갔을 때였다.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배운 아들은 어느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희박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과 함께 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넌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서 의무는 다 해야 해. 앞으로 돌아와 군대도 가야 해.”
  “싫어, 난 여기 시민권을 딸 거야. 그 손바닥만한 나라에 왜 가?”
  
  나는 순간 얼떨떨했다. 아들은 나를 보고 차를 사달라고 했다. 넓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동차는 남자들의 또다른 로망인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차를 좋아하던 아들은 공부보다 차에 미쳐 있었다. 차량을 개조하는 그룹에 끼어 밤이고 낮이고 기름때를 묻혀가며 그 일을 했다. 밤이면 개조된 차량으로 다른 아이들과 도심에서 하는 도로경주를 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들은 좋은 차를 사달라고 했다.
  
  “차는 굴러다니면 되는 거야. 소박한 중고차 싼 거를 타고 다녀.”
  그렇게 말하는 나의 말에 아들은 반발하며 소리쳤다.
  
  “싫어. 다른 아이들은 다 BMW나 벤츠를 타는데 나만 똥차를 타고 다니면 챙피해.”
  나는 점점 혈압이 올라가고 있었다.
  
  “유학온 자식이 어떻게 방에 책도 제대로 없냐?”
  “책은 다 학교에 있어. 그리고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서 시험 때 보고 버리면 돼.”
  
  서로의 말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였다. 기회를 노리던 아들도 공격성을 발휘했다.
  
  “난 아빠가 음식먹을 때 교양 없이 쩝쩝대는 소리가 싫어.”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아들편을 들면서 나섰다.
  
  “맞아 그건 가난한 출신을 나타내는 태도야. 여보. 굴러만 다니는 헌 차를 타라고 하는 건 당신같이 힘든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들 얘기지 우리 아이들은 한 차원 높은 환경이잖우? 우리 애들이 팔자좋게 태어난 덕인데 왜 그래요? 그리고 당신이 아메리카 대륙을 몰라서 그렇지. 여기 보면 남자들은 다 차가 신(神)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이해해요.”
  
  가족간의 문화충돌 인식의 충돌이 생겼다. 분통이 터진 내가 소리쳤다.
  “난 싫어, 허영에 들뜬 새끼 귀족 만들려고 내가 일해온 게 아니란 말이야. 아들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던 놈들의 모습이 돼 버렸어.”
  
  그렇게 하고 다음 날 비행기표를 사서 나는 서울로 돌아와 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오랜 세월을 아들과 심정적으로 적대시하면서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육십년대 중학 시절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가 광나루에 가서 흙탕물이 흐르는 강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었다. 당시 그 옆은 새로 지어진 초현대식의 워커힐호텔이 있었고 풀장에는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수영장 철책으로 넘겨다 본 그들의 모습이 화려하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곳에 데려가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불평을 했었다. 따지고 보면 그 때의 철없던 내 모습이나 아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
  
  아들은 자전거 체인에 발이 끼어 병원응급실에 가서 여덟 시간을 대기했는데 옆에는 아빠도 엄마도 없었다고 했다. 의사조차도 와서 약을 발라주지 않더라고 했다. 녀석의 외로움이었다. 아들은 또 불량하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백인 경찰관이 와서 무자비하게 패는 걸 고스란히 당했다고 했다. 나는 아들을 조금도 도와줄 힘이 없는 무능한 아버지였다. 못먹고 못살더라도 함께 하는 게 가족이었다. 나는 잘못 유학을 보낸 것이다. 그래도 세월이라는 건 선생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다.
  
  뒤늦게 함께 사는 아들이 마흔 살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소박하고 철저한 생활인이 되어 있다. 차도 굴러다니는 것만 타면 된다고 하고 성경을 읽고 노숙자들을 돌보러 가고 있다.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는 것 같다.
  
  
  
  
[ 2021-06-16, 21: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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