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사를 하던 집 예쁜 딸과의 조우(遭遇)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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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관으로 모셨던 세 분과 점심을 했다. 모두 고위직 법조계 출신이었다. 법조인들의 관습은 제일 높았거나 나이든 분의 얘기를 다른 사람들이 겸손하게 경청을 하는 것이다. 고위 법관을 지냈던 분이 학교 시절의 공부 잘했던 얘기를 했다. 그게 일반적인 화제이기도 했다.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슬쩍 화제의 방향을 돌렸다.
  
  “선배님 이 자리에 저 빼고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인생에서 실수하고 후회했던 얘기를 해주시면 저희 후배들이 배우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도 서울법대와 그들이 나온 지방 대도시의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라면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알았어. 그러면 그 얘기를 털어놓아야 하겠네.”
  좌장인 그가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 표정이다가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젊어서 판사 노릇을 할 때야. 대학 시절 가정교사를 할 때 그 집 딸이 나를 좋아했었어. 나도 그 시절 그 여자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좋아졌지. 그런데 고시 공부에 전념하느라고 연애할 시간은 없었지. 그러다가 고시에 수석을 하고 판사가 됐지. 그렇지만 결혼은 다른 사람과 했어. 왜 그런 게 있잖아?”
  
  대충 짐작이 갔다. 판사가 된 친구들을 보면 세상이 그대로 놔두지를 않았었다. 재벌집이나 권력은 꼭 똑똑한 판사사위를 두고 싶어 했다. 고시공부할 때 연애를 하고 그 사랑이 결혼까지 간 경우는 드물었다. 나는 그래서 사랑을 선택하고 가난한 판사생활을 감내하는 친구들을 좋아했다. 과거의 사랑이 떠올랐는지 노인이 된 선배의 목소리에 윤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내가 한창 일을 하던 사십대 중견 판사시절 우연히 그 여자를 만났어. 그 여자는 아직도 나를 마음에 품고 사랑하고 있는 것 같더라구. 나도 좋았지. 그래서 틈틈이 봤어.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나중에는 같이 호텔 방까지 가게 된 거야. 호텔방에 들어갔는데 여자는 창가에서 밖에 시선을 던지며 서 있었어. 나는 그 뒤에 서 있었어.”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시청률이 높았던 ‘실락원’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떠올렸다. 옛 애인을 만나 사랑을 불태우다 정사(情死)로 끝을 낸 아름다운 사랑의 얘기였다.
  
  “그래서 그 다음은요?”
  내가 호기심이 가득해서 물었다.
  
  “그 여자는 내가 뒤에서 포근하게 안아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더라구. 그런데 나는 뒤에서 얼어붙은 채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어. 이러다가 판사를 못해 먹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속으로 떨면서 망설였지. 그러다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왔어. 여자가 뒤에서 그냥 가시느냐고 하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지. 그걸로 끝이 났어.”
  
  “그러시면 나쁜 놈이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말했다. 사실 그게 우리들의 공통된 이기주의적이고 비겁한 생리였다. 사랑보다 체면이나 사회적 지위가 먼저였다. 앞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이 미소를 지으면서 놀렸다.
  
  “짐승보다 못하다는 소리도 들으셨겠네요. 짐승은 앞뒤 가리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으로 다가가는데 판사는 그게 되지 않았네요.”
  
  사실 우리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다 똑같은 행동을 할 비겁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해서 했더니 옛날 부하들한테서 욕만 먹네. 나 원 참.”
  
  그렇게 예전의 상관을 모시고 부하들이 모여 즐거운 점심을 마쳤다. 영원 같았던 젊음도 어느 순간 소리없이 잦아들고 우리는 칠팔십대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이 짧은 삶에서 정말 소중한 건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 나는 마음을 활짝 열고 과거의 부하들 앞에서 사랑과 후회를 솔직히 고백하는 상관이었던 선배는 잘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나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의 단점을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노년으로 가면서 자신을 활짝 열어보이고 닥쳐오는 세월을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선배인 그 분에게서 배운 하루였다. 그 부인이 이 글을 보시더라도 양해하실 것으로 믿는다.
  
  
  
  
[ 2021-07-15, 09: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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