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중위 계급장 달았지만 우리는 결코 같지 않아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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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法服)은 무대의상>
  
  일기를 뒤지다 이십대 중반 겨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십 년 세월 저쪽에 있는 누렇게 변색된 오래된 흑백사진 같은 기억이었다. 쌓인 눈이 꽁꽁 얼어붙고 칼바람이 치던 겨울의 어느날이었다.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단 나는 헌병대 사무실에 앉았다가 전입해 오는 신임 법무장교를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울법대를 졸업한 신임 법무장교는 사법고시를 일찍 합격한 엘리트였다.
  
  나는 지프차를 타고 안양역으로 갔다. 역 앞에는 볼이 홀쭉하게 들어가고 유난히 하얀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쓴 육군 중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나이가 같은 그는 계급도 똑같은 중위였다. 우리 법무장교는 훈련을 마치면 중위로 임관했었다. 지프차의 앞문을 연 순간 그가 나보고 뒤로 가라는 턱짓을 했다. 군대에서 지프차의 운전병 옆이 상석이었다. 그가 나보다 위라는 의사표시였다. 나는 그에게 앞자리를 양보했다.
  
  어느새 점심 때가 됐다. 나는 그를 역 근처의 허름한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곰탕을 두 그릇 시켰다. 곰탕의 뜨거운 국물이 얼어붙은 창자를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작은 중위 월급으로 밥을 샀는데도 그는 여전히 차디찬 표정을 지으며 감사의 말 한 마디가 없었다. 다시 부대로 가는 차 안에서 그가 뒤돌아서 나를 보며 위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같은 중위 계급장을 달았지만 우리는 결코 같지 않아요. 분명히 알아두쇼. 나는 당신을 지도하는 입장이요.”
  
  순간 그와 내가 뭐가 다를까 생각해 봤다.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채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당시 이 사회에서 가장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군법무관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 무렵 군대는 계급에 상관없이 사법고시 출신 군법무관을 귀족같이 존중해 주었다. 부대에서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도 모두 쉬쉬하며 덮어주던 분위기였다. 장기 직업 법무장교인 그들의 직속 상관들도 그들을 대접해 주었다. 제대하자마자 판사가 되는 그들에게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는 계산들이 깔려있었다.
  
  그가 보기에 나는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아류같은 존재였다. 당시 사법고시에서 낙방한 사람들을 상대로 어쩌다 한 번씩 장기 군법무관을 채용하는 시험이 있었다. 군의 법무장교를 보충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사법고시에서 떨어졌던 나는 그 시험을 통해 군에 들어온 것이다. 사법고시 출신들은 나 같은 보충된 법무장교를 짝퉁으로 여겼다. 나 같은 짝퉁에 대한 실무교육이 특이했다.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사법고시 출신한테서 도제식으로 배우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그럴 만한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우리시절 세상은 냉혹한 면이 있었다. 중학교부터 일등품 이등품 삼등품이 나뉘어 교복이 다르고 거기에 단 배지가 달랐다. 그 배지를 보고 사람들은 우리를 다르게 취급했다. 그런게 당연한데도 나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 나갔다.
  
  “내 눈에는 어깨에 붙은 계급장이 똑같은 중위고 나이도 같은데 뭐가 다르다는 거지? 좋은 친구가 되면 딱 맞겠네.”
  
  그는 내 말에 정색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다음날부터 그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따금씩 다른 부서의 장교들이 놀러 왔다. 그들은 우리 두 명을 같이 대해 주었다. 그럴 때면 그는 항상 못마땅한 듯 놀러 온 장교들에게 자신과 나를 이런 말로 구분해 알려 주었다.
  
  “나는 말이죠. 내후년에 제대하고 바로 판사가 될 사람이에요. 그런데 저 사람은 십년이 넘게 오랫동안 군에 근무할 사람이에요. 그리고 판사도 못돼요. 법무장교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에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짝퉁신세의 서글픔을 느꼈다. 또 그와 같이 선민의식이 있는 사람이 이 사회의 법관이 되는 것도 슬펐다. 그가 여러 사람을 슬프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잘 어울려 놀았다. 퇴근하고 영등포역 부근의 작부들이 있는 술집에 가서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아 나오는 막걸리를 마시며 젓가락으로 상을 치면서 흘러간 가요를 불렀다. 이차로 미로같은 시장 뒷골목의 오래된 여관에 들어가 방을 잡고 거기서 밤새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밤이 이슥해질 때 골목을 지나가며 ‘찹살떡 사려 메밀묵’ 하고 소리치는 행상을 불러 빈 속을 채우기도 했다. 곧 판사님이 된다고 자랑하는 그는 버릇같이 바지통이 넓은 사각팬티만 입고 앉아 화투장을 쥐고 있었다. 넓은 팬티 사이로 나온 가는 다란 다리가 애처러웠고 깊숙이 메추리알 같은 걸 담은 낭심이 보이기도 했다. 인간이란 발가벗으면 다 약하고 별 볼 일이 없는 존재 같았다.
  
  그가 제대하고 나가 판사가 됐다. 나도 짝퉁 신세가 더러워 다시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다. 물건은 짝퉁이 있지만 인간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었다. 합격자 명단에는 후일 대통령 후보가 된 홍준표부터 장관이 된 추미애까지 여러 인물이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바람결에 군에서 같이 근무했던 그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아주 무섭고 근엄한 재판장이라고 했다. 그에게 잘못 걸리면 변호사나 당사자나 아주 혼이 난다고 했다. 세월이 다시 흘렀다. 그가 법원장이 되고 또다시 진급해서 고등법원장이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대법관까지 무난히 될 것 같았다.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에요, 여기 법원에 오는 길이 있으면 내 방에도 한번 놀러와 주지 그래요. 내가 뭐든지 부탁하면 잘해 줄께요. 한번 보고 싶어.”
  
  서슬이 퍼런 칼날 같던 그도 세월에 풍화되어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나도 그가 전혀 밉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젊어서는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아니면 어깨에 붙은 계급장이나 입고 있는 관복을 자기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 입고 있던 불편한 무대의상이었다. 이런 걸 진작 알았으면 그때 슬프지 않았을 텐데.
  
[ 2021-07-18, 10: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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