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선(船)에서 바다로 사라지는 사람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죽음을 결제해 두는 마음>
  
  칠월 말의 뜨거운 태양빛이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도로가 뿜어 올리는 복사열에 멀리 앞에 보이는 차들이 아지랑이 속 같이 흔들려 보였다. 나는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남해를 향하고 있었다. 바닷가 근처에 육십년대 독일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귀국해 모여 살았다는 독일마을을 지나갔다. 유럽의 아름다운 지방 같은 모습이었다. 그 마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다랭이 마을이 목적지였다.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작은 논들이 포개져 있는 걸 다랭이논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차창으로 바닷가 높은 절벽 위에 무성하게 자란 풀이 나 있는 게 보였다. 그 아래로 툭 트인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핸들을 잡고 앞을 보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나는 판사를 그만두고 혼자 배낭을 메고 전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어. 여기도 와 본 적이 있어. 해변 절벽에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다랭이마을까지 간 적이 있지.”
  
  친구는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게 진짜 여행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도 혼자 걸었어. 그렇게 혼자 하는 여행이 좋아. 친구나 남과 같이 가면 그 사람들을 신경써야 하고 배려해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내가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야.”
  
  나는 체력도 약하고 용기도 부족했다. 나는 겁이 많은 것 같았다. 외국의 낯선 공항에 내려 문을 나설 때 느끼는 막막함과 스산함이 싫었다. 혼자 하는 국내 여행도 그런 감정의 색깔이 조금 옅기는 하지만 본질은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그걸 즐기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용기가 대단하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막상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렇게 혼자 하는 여행을 거의 해 보지 못했어. 혼자 다니면 가는 길에서 갑자기 아파서 쓰러질 수도 있잖아? 그리고 강도나 불량배를 만나 혼이 날 수도 있고 말이야.”
  
  내가 친구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산을 혼자 걷다가 마비증세가 와 기어서 몇 시간을 내려가 병원에 갔다는 친구의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옆에 동행이 없으면 혼자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아는 소설가 정을병씨의 외아들은 혼자 배낭여행을 갔다가 아프리카의 어느 지점에서 영영 소식이 끊기기도 했다. 지금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혼자 여행이란 예상치 못한 위험 앞에 서는 연습 같기도 했다.
  
  “이봐 엄 변호사, 이미 우리같은 칠십 고개 노인이 혼자 여행을 다니는데 누가 덤벼들겠어? 건드리지도 않아. 또 우리가 우범지역은 갈 일도 없고 말이야. 물론 혼자 여행을 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킬 경우도 상상할 수 있어. 그런 때 살려니까 발버둥치지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가 됐구나 마음먹으면 편한 것 같아. 이제 갑자기 죽어도 괜찮을 나이가 되지 않았나?”
  
  “그렇구나 죽어도 되는구나?”
  
  갑자기 가슴 속으로 어떤 울림이 전해져 왔다. 깨달음 비슷한 것이라고나 할까. 인간에게는 여러 형태의 죽음이 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온몸에 링거줄을 주렁주렁 달고 기다리다가 죽는 죽음이 대부분이다. 굳이 그런 형식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 크루즈여행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유럽쪽의 백인 노인 중에는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어느 순간을 기다리다가 조용히 바다로 사라져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음의 마지막 장소를 그렇게 잡는 것 같았다.
  
  소설가 정비석씨가 쓴 소설에서 주인공 김삿갓의 인생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다. 평생을 방랑객으로 떠돌던 김삿갓이 마지막에는 전라도 무등산 쪽의 동복(同福)을 구경하고 샛강에 떠 있는 작은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그 배 안에서 일생을 마쳤다. 죽음을 미리 결재해두고 다닌다면 자유로울 것 같았다. 그리고 진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쓸데없는 두려움과 걱정에 묶여 나는 상자곽 속 같은 일상에 묻혀 산 면이 있다. 이제 지팡이 하나에 가벼운 배낭 하나를 메고 집을 나서야겠다.
  
[ 2021-07-31, 10: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