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을 통과한 부자(富者)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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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생활을 마치고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는 변호사 일도 거의 하지 않고 여생을 봉사로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그를 보면 복 받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수저 출신인 그는 좋은 인품을 가진 아버지의 성격까지 물려받은 것 같았다. 대학 시절이었다. 그때는 전국의 변호사들이 몇 명 되지 않을 때였다. 그는 전국을 여행하다 돈이 떨어지면 아무 데나 법률사무소를 찾아 들어가 아버지 이름을 대면 돈을 꾸어 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덕을 아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그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이런 속 얘기가 튀어나왔다.
  
  “우리 중학교 동창인 영식이 알지? 그 친구가 같은 동네에 살았어. 그런데 그 친구는 아주 가난한 집 아들이었지.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영식이는 화투를 좋아했어. 자기가 용돈이 없으면 꼭 나보고 ‘섯다’를 하자는 거야. 그런데 그 친구 ‘섯다’를 하는 걸 보면 놀이가 아니라 결사적이야. 돈을 따면 좋아하지만 내가 좋은 패를 들고 있으면 그 눈에서 핏발이 설 정도로 심각했어. 나는 상황에 따라 적당히 져 주곤 했어.”
  
  “작은 돈이라도 노름이고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건데 어떻게 져 줄 수가 있지? 같이 노름을 한 다른 친구들은 어땠어?”
  
  내가 되물었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게 나는 얼핏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도박판에서는 친구끼리도 작은 돈을 가지고 시비가 붙었다. 대학교수로 신사처럼 행동하던 친구가 포커판에서 사기를 치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돈을 따려고 하는 그 친구의 표정이 너무 절박해 보이니까 내가 양보한 거지. 나야 그래도 여유가 있는 집 아들 아니야? 돈이 떨어지면 아버지한테 가서 용돈 더 주세요 하면 군지렁거리면서도 아버지가 돈을 줬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는 가난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잖아. 그래서 양보한 거지. 다른 친구들은 노름판에서 따지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었지.”
  
  흙수저 출신은 금수저 출신을 돈을 얻어낼 수 있는 이용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수저는 모든 걸 알고 양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져 주고 잃어준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정말 이루기 어려운 경지였다. 나는 금수저 출신의 그 친구가 누구와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양보하고 져 주는 사람에게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태도는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어 로펌을 경영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잡은 사냥감을 앞에 놓고 다투는 이리떼 같은 게 겉으로는 세련된 변호사 사회의 이면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다른 변호사들의 이익 쪽으로 행동했다. 로펌을 청산할 때 수익분배에 욕심을 내는 다른 파트너 변호사에게 양보했다. 그는 화가 나는 속을 뒤에서 내게 털어놓은 적은 있지만 그의 이익을 빼앗아 간 파트너에게 따지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그가 가난해지는 걸 보지 못했다. 그가 돈이 떨어질 때면 거액의 수익이 되는 사건이 찾아와서 그가 더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의 반대쪽에 있었던 흙수저 출신 친구의 인생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 가난한 집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나와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었다. 말 한번 제대로 나눈 적이 없지만 독특하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작은 눈이 반짝거리는 머리가 비상한 친구였다. 그 친구는 교실 안에서도 옆에 앉은 아이와 교묘한 섯다판을 벌이고 있었다. 둘이서 앞에 놓인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치고 그 페이지의 숫자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두 장의 화투패 대신에 책의 페이지 숫자를 이용했다. 그가 접근하는 것은 재벌집 아들들인 것 같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재벌 집 아들의 종이 되어 그 그늘에서 일생을 보낸 것 같았다.
  
  그런 종류의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자 친구에게 기생하면서 던져주는 달콤함을 맛보는 것이다. 나중에도 부자 친구의 회사에 들어가 학연의 덕을 보면서 일생을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끝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한쪽은 주인이 되고 다른 한쪽은 철저한 종의 신세였다.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히는 것 같았다.
  
  삶의 강을 따라 바다 근처까지 오니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기대야지 인간에게 기대면 돌아오는 것은 수모일 가능성이 많다. 부자라고 다 부자가 아니다. 일부러 져 주고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그 친구가 진짜 부자였다. 갑자기 성경 속 아리마데라는 곳의 부자 요셉이 떠오른다. 덕이나 보려고 모여들었던 가난한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 부자인 요셉은 예수의 수의와 묘지를 사서 예수의 몸을 눕혀주었다. 그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부자였을까.
  
  
  
[ 2021-09-15, 20:4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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