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호사 일이 재미있어요"
성공한 사람은 자기의 천직을 바로 깨달아서 거기에 전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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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직(天職)>
  
  변호사 선배중에 특이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겨울 점심 무렵이었다. 허름한 음식점 구석에서 그가 뚝배기에 담긴 설렁탕을 혼자 먹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는 남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판사를 잠시 하다 사표를 쓴 그는 사십 년의 세월을 변호사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소박을 넘어 가난해 보일 때까지 있었다.
  
  내가 잠시 검사가 하는 일을 배울 때였다. 지도검사와 나는 그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은 적이 있었다. 변론을 하러 온 그의 접대인 셈이다. 먹던 음식이 남았다. 그는 남은 것들을 꼼꼼하게 포장해서 가지고 갔다. 그는 내게 접대하는 자리라도 아까운 음식을 체면 때문에 놔두고 가면 안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법조타운 안의 재력가로 통했다. 그가 거래하는 은행에서 그의 예금고가 가장 크다는 것이다. 그가 돈을 빼버리면 지점 운영이 휘청거릴 정도라는 얘기였다.그의 사무실에는 끊임없이 의뢰인이 찾아들었다. 잠시 반짝 모여드는 전관변호사들과는 달랐다.
  
  판사들은 뒤에서 그를 칭찬했다. 다른 변호사들은 뜻대로 사건이 안되면 불평을 하든가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는데 그는 판결이 기대에 어긋나도 표정 한번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찾아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로가 틀림없었다. 그 많은 사건을 하면서도 그의 사무실에서는 의뢰인의 불평하는 소리가 난 적이 없다고 했다.
  
  변호사업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었다. 그는 혼자서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등 뒤의 큰 벽을 채운 격자 모양의 서류 칸마다 누런 기록 봉투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변호사업의 노하우를 배우러 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소파를 권하면서 마주 앉았다.
  
  “나는 아무것도 말해 줄 게 없어요. 별다른 삶의 모색도 해본 적도 없고 능력도 실력도 없어요.”
  
  “변호사란 직업은 인생에서 어떤 거였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이미 칠십에 가까운 나이였다.
  
  “변호사 자격은 나한테는 좋았던 게 틀림없어요. 변론을 한다는 게 그 자체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낭패를 당하고 당황하는 사람들 옆에서 사소한 것이라도 증거를 어떻게든 찾아서 구제해 주는 거지. 나는 변호라는 일 자체가 좋아요.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니까 사건이 점점 줄어드는 거야. 그러다 오랜만에 형사사건을 맡았죠. 법정에 가서 변론을 하는 순간 ‘아 내가 변호사구나’ 하는 기쁨이 다시 오더라구요. 지금 내 나이에 누가 형사변론을 해? 다들 손을 놓고 있지.”
  
  “그 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직접 해오셨어요?”
  젊은 변호사를 고용해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죠.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밤 늦게까지 일에 파묻혔어요. 내일은 무슨 준비서면을 써야 하고 모래는 어떤 변론요지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계획서를 만들어 놓고 숙제를 하듯이 한 줄 한 줄 지워가는 게 재미있었죠. 소송의 상대방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이쪽이 철저히 준비서면을 쓰는 거죠. 같은 변호사라도 상대방 변호사의 잘 쓴 서면들을 보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거든. 그래서 내가 다 직접 해요.”
  
  “일 말고 다른 취미는 없으세요?”
  “골프를 조금 해 봤는데 재미가 없더라구요. 시간도 아깝고. 특별히 즐기는 게 없어요. 요즈음은 손자를 데리고 노는 게 좋아요. 이 녀석이 팽이를 좋아해서 내가 사준 게 두 박스쯤 되나? 하여튼 난 이 변호사 일이 취미이기도 해요.”
  
  “의뢰인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많지 않습니까? 제 경우는 의뢰인의 탐욕이나 집착 때문에 상처받은 경우도 많았는데 선배님의 경우는 어땠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인간혐오가 오기도 했다.
  
  “맞아요. 송사를 벌이는 사람 치고 좋은 사람은 사실 드물죠. 그냥 참고 넘어가도 될 걸 굳이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도 많고 피고도 대부분은 돈 떼먹고 버티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무식하고 돈만 많은 놈들은 변호사보고 머슴 부리듯 명령하기도 하죠. 이런 때 우리는 지성과 전문지식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해요. 법률을 쉽게 설명해서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시켜야 합니다. 왔다갔다하면 안돼요. 그래야 상대방에게 짓밟히지 않습니다. 건방을 떨던 사람들도 ‘아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죠.”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얼굴에 뭔가 떠오르는 표정이 돌더니 말을 계속했다.
  
  “참 내 얘기를 하나 하죠. 사기범을 변호했는데 집행유예를 받기 위해서는 도중에 합의가 필요했어요. 돈이 없다고 해서 내가 우선 돈을 꿔줬죠. 석방이 되고 나를 찾아와 시비를 걸더라구요. 변호사 선임비는 물론이고 내가 꿔 준 합의금까지 안주려고 하는 짓이지. 그래서 잘먹고 잘 살아라 하고 보낸 적이 있어요.”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의뢰인 중에 똑똑한 체 하고 수시로 따지고 묻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 사건은 잘 안돼요. 변호사가 에너지를 사건 자체에 쏟아야 하는데 당사자에게 뺏겨서 그런 것 같아요. 애정이 식으면 일이 안되는 거예요.”
  
  “왜 변호사가 되고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형편이 어려운 집 아들이었어요. 주변도 가난하고. 그게 변호사가 된 동기라고 할까? 판사를 할 땐데 저녁 6시가 됐는데도 재판을 할 게 아직 50건이나 남아있는 거예요. 방청석에는 당사자들이 꽉 차 있고 그래서 내가 기일을 연기신청하시면 그렇게 해 드리겠다고 하는데 한 사람도 손을 들어 다음에 하자는 사람이 없었어요. 밤 11시까지 재판을 하고 쉬지 않고 판결문 100건을 쓰기도 했죠. 판사만큼 일을 하면 변호사로 잘 살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래서 변호사를 개업한 면도 있어요.
  그런데 막상 해 보니까 변호사는 더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이더라구. 따지고 보면 의뢰인들이 돈을 주고 산 사람인데 그게 맞죠. 변호사가 받는 돈 안에는 의뢰인으로부터 행패를 당하는 값. 판사들에게 욕을 먹거나 소송의 상대방 측으로부터 모멸감을 느낀 데 대한 위자료도 들어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더러 곤혹을 당해도 푸시킨의 시(詩)처럼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힘들게 벌어서 돈을 어떻게 쓰셨어요?”
  “돈은 확실히 다른 변호사보다 많이 번 셈인데 재테크를 할 능력이 없으니까 불리지는 못했어요. 가난한 집 출신이라 형제자매들한테 모두 집 한 채씩 사 줬어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 자신이 밥걱정 안할 정도죠.”
  
  “개인적으로 돈을 얼마나 씁니까?”
  “글쎄요 내가 쓰는 돈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내 허리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새로 양복을 살 필요도 없었구요. 오래돼서 섬유가 해져도 입을 때까지는 입고 살아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시고 싶습니까?”
  “판사를 잠시 한 것 외에는 사회에서 감투를 쓴 적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나는 이 변호사 일이 재미있어요. 내가 변호사를 할 수 있는 때까지 할 거에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건강이 있는 한 이 일을 하는 거죠. 그렇지만 이제 많이는 안 남았다고 생각해요. 병들면 일을 그만둬야죠. 나 이상으로 죽음도 가까워졌죠. 그것도 거부하지 말고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는 변호사가 천직인 사람이었다. 옛날부터 성공한 사람은 자기의 천직을 바로 깨달아서 거기에 전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지 않았다면 베토벤이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재능은 묻혀지고 일생은 실패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인간 각자가 자신을 빨리 알고 하늘이 명한 직분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얼마 전 그의 사무실이 있던 빌딩을 가보았다. 그의 사무실 팻말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 여든이 된 그는 이제 어딘가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 같았다.
  
[ 2022-05-11, 01: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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