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해한다는 것
"법률 교과서나 판례 속에 세상이 다 들어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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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보면서 이십칠년 전인 천구백구십오년 봄 나른한 법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법대에는 아직 소년티가 나는 해말싹한 얼굴의 단독판사가 앉아 있었다. 변호사 대기석에는 몇 명의 변호사가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료함을 때우려고 그러는지 옆에 앉았던 변호사가 내게 말했다.
  
  “판사가 너무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나 됐을 것 같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변호사였다. 나는 기록 표지에 있는 판사의 생년월일을 보고 말해주었다.
  
  “스물아홉 살이네요.”
  “판사가 이십 대면 너무 젊어. 내 둘째아들이 서울대 교수인데 마흔두 살이고 막내가 마흔 살인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요. 판사도 나이가 마흔은 넘어야 할 것 같아. 저렇게 젊은 사람이 인생 경험이 얼마나 있겠어? 법 교과서 외에 책을 읽을 틈이나 제대로 있었겠나?”
  
  나이로 치면 나는 그 변호사의 둘째아들뻘인 셈이었다. 그런데 노인의 얼굴은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다. 주름살이 없는 거무스름한 얼굴에는 건강미가 넘치는 것 같았다.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내가 물었다. 오십대쯤으로 보였다. 그 변호사가 싱긋 웃더니 품 속에서 경로우대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뜻밖이었다. 여든 살이 가까워 오는 나이였다. 그 노인 변호사가 말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이제 법정에 오면 내 나이 또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전부 다 땅 속으로 들어갔는지 나 원 참. 그래서 내 나이 또래만 우연히 발견하면 찾아가서 구십도로 허리를 굽히고 인사하는 게 요새 내 입장이우.”
  
  “그 연세에도 변호사 일을 하실 수 있는 거에요?”
  내가 신기해서 물었다.
  “변호사 생활이 사십 년이 넘어가는데 아직 건강에 전혀 이상이 없어요. 글도 쓰고 법률 서류를 쓰는 데도 전혀 지장이 없지.”
  
  “어떻게 그런 건강을 가지실 수 있죠?”
  “내가 젊어서부터 술 담배를 안했어요. 그리고 고기도 먹지 않았어요. 학교시절 축구선수를 했죠. 그 건강으로 지금까지 아무런 장애 없이 변호사 일을 하고 있어요.”
  
  내게 말을 하는 그는 다른 변호사가 먼저 자기 사건의 변론을 하도록 양보해 주고 있었다. 보통은 자기 사건을 빨리 하고 돌아가려고 초조해하고 더러 다투기도 했다. 그는 마음이 넉넉한 것 같았다. 이윽고 판사가 그의 사건번호를 불렀다. 그는 변호인석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증인을 신문했다. 자세도 청년보다 꼿꼿했다. 그 노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는 재판을 마치고 변호사 대기석으로 돌아와 가방을 챙기면서 내게 한 마디 했다.
  
  “법서 말고 인문학 서적을 몇 수레는 읽어야 세상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법률교과서나 판례 속에 세상이 다 들어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그것들의 밖에 더 넓고 엄청난 세계가 있으니까. 총명한 것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하고는 달라요.”
  
  법정을 빠져나가는 노인의 등은 꼿꼿하고 힘이 들어있었다. 세월이 꽤 흐른 지금 그 봄날 법정에서 봤던 노인 변호사는 지금은 땅 속에 흰 뼈를 눕힌 채 편안하고 깊은 수면 속에 있을 것이다. 그때 푸르렀던 나도 칠십 고개를 넘어 머리에 하얗게 눈이 내려 덮였다. 그 노인처럼 변호사 생활 사십 년이 거의 다 왔다. 그 노인은 건강이 있고 일이 있고 의욕이 있어 늙어도 늙지 않았다. 게으른 나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하면서 열심히 하지 못했다.
  
  그 노인의 말처럼 인문학 서적을 몇 수레 읽으려고 작은 노력은 해 왔다. 아직도 갈 길은 먼데 눈이 침침해져서 보고싶은 책을 앞에 놓고 읽기가 힘들다. 눈이 좋을 때 더 열심히 읽었을 걸 하는 후회를 한다. 해야 하는데 하면서 게을러서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악기도 배웠어야 하는데, 외국어도 공부했어야 하는 데로 후회가 과거형으로 바뀌어 간다.
  
  실버타운의 지하 보일러실에서 섹스폰을 연습하는 팔십대 노인의 투지가 대단하다. 그 노인은 어떤 꿈을 꿀까 궁금하다. 실버타운의 계단을 마치 에베레스트를 오르듯 헉헉대면서 오르는 노인이 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게으른 나는 했어야 하는 데로 흘러간 것들을 아쉬워하기만 한다.
  
  
  
[ 2022-07-28, 10: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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