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정신
1976년 가야산 자락의 한 암자(庵子)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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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근처의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다가 서가 저쪽에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남자를 봤다. 그도 나를 아는 듯한 눈길이었다. 흰머리에 주름이 생기고 볼살이 늘어졌지만 그 속에서 생글생글 웃던 그의 이십대 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회상하게 해 주는 몇 개의 삽화가 차근차근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구백칠십육년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눈 덮인 가야산 자락의 한 암자에 묵고 있었다. 그곳의 요사채에서 대략 여섯 명 가량의 남자들이 묵고 있었다. 고시생도 있었고 지명수배를 받고 도피해 와 있는 사람도 있었다. 허름한 작업복에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은 빨치산 영화에 나오는 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옆방에는 시위 주도를 하다가 지명수배를 받고 피신한 서울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방안 가득 러시아혁명사, 중국혁명사, 프랑스혁명사 등의 책을 쌓아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 옆방에는 권씨라는 지방대 출신이 있었다. 작달막하고 궁상이 묻어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수은주가 영하 십오도 아래로 내려가던 날 아궁이의 타다 남은 장작 위에 돌덩이 같이 굳은 떡을 같이 구워 먹으면서 얘기를 했었다. 그가 했던 이런 말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우리 아버지는 남의 묘지기를 하면서 그 앞에 있는 두 마지기 논으로 자식들을 키웠어요. 워낙 가난해서 그런지 나는 썩지만 않았으면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어. 나는 고시에 붙으면 불고기 식당집 딸에게 장가를 들 거야. 그래서 고기를 실컷 먹고 친구들도 먹일 거야.”
  
  그 옆방에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나이든 고시생이 묵고 있었다. 옆으로 찢어진 눈에 각진 턱을 가진 시골 농부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밥을 먹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벌써 십 년째 고시 공부를 하고 있어. 병역을 연기하다가 작년에 방위병으로 군대에 갔는데 내무반에서 어린 놈이 나보고 한 되짜리 주전자에 가득찬 물을 단번에 마시라고 하더라구. 별 기합이 다 있더라구. 그래서 그걸 다 마셨지.
  며칠 전에 서울에 다녀갔는데 종로 거리에서 몇년 전 고시에 합격한 대학 동기가 부인과 걸어가는 걸 봤어. 좋은 양복을 입고 성공한 공기를 주변에 두르고 가는데 상대적으로 나는 너무 초라하더라구. 그래서 얼른 골목에 숨어서 가는 뒷모습을 지켜봤지.”
  
  그의 말이 내 마음의 기슭에 물결 치는 것 같았다. 대충 비슷한 처지들이었다. 그곳에 모인 남자중에 항상 생글생글 웃는 표정의 착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명문 집안인 것 같았다. 대법관인 매형도 있고 법과대학 학장인 친척도 있다고 했다. 그는 성격이 밝고 명랑했다. 고시생들에게 노래도 불러주고 성탄절 승방에서 담요를 치마같이 입고 모노드라마도 연기하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사법시험 원서의 증명사진을 풀로 붙이고 그게 혹시 떨어질까 봐 누르고 또 누르면서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나와 모노드라마를 연기했던 그만 아예 일차시험에서 떨어졌다. 지방대를 나온 묘지기 아들과 기합으로 강제로 주전자 물을 마신 사람이 고시에 합격했다.
  
  낙방한 나는 짐을 싸들고 암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 해 군대로 갔다.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암자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이 검사장이 되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지명수배를 받고 혁명사를 공부하던 사람은 유명한 정치학 교수가 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모노드라마를 하던 그 남자를 서점에서 만난 것이다. 그도 비로소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 시절 저는 헝그리 정신이 부족했어요. 고시를 그만두고 회사로 들어갔죠. 그 회사도 벌써 정년퇴직했죠.”
  
  나는 차라도 한 잔 하면서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의 만남이 괴로운 듯 씁쓸한 표정으로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칠십이 넘은 노인들이 된 우리들은 이제 모두가 다시 평등한 자연인이었다. 각자 자기의 무대에서 맡았던 배역을 마치고 객석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는 아직도 맡고 싶었던 역할에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에게서 ‘헝그리 정신’이라는 걸 보았던 것 같다. 그게 뭘까? 챔피언 벨트를 딴 한 권투선수가 라면만 먹고 헝그리 정신으로 세계를 때려눕혔다고 했다. 달동네 판자집에 살던 동네 친구는 원단 샘플이 담긴 가방을 들고 홍콩의 구룡거리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부자가 됐다. 그는 허버드 대학에 진학시킨 아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가르친다고 했다.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가 된 원동력은 ‘헝그리정신’이라고도 한다. 우리 시절 가난은 투지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그 투지는 인생 무대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배역들을 맡게 했다. 그것도 지나면 순간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와 텅 빈 객석 사이에 선 우리 세대가 지금 느끼는 건 인생이 한바탕의 꿈이라는 인식 아닐까.
  
  
  
  
[ 2022-11-26, 10: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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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타임즈     2022-11-26 오후 6:14
헝그리精神ㅡ맨주먹精神.
모노드라마ㅡ獨白劇.
챔피언 벨트ㅡ우승자 허리띠.
샘플ㅡ標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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