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들의 밤 10시간 30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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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장군(將軍)들의 밤 10시간30분
  
  정승화(鄭昇和)·노태우(盧泰愚)·유학성(兪學聖)·허삼수(許三守)·정병주(鄭柄宙)·김진기(金晋基)등 수십명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엄밀한 사실확인을 거쳐 재구성한 12·12 사건의 실황
  
  경복궁엔 왜 모였나
  총장공관에선 누가 먼저 쐈나
  최대통령은 왜 연행결재를 미뤘나
  공수여단, 한강을 건너다
  수경사와 특전사, 이렇게 무너졌다
  
  <1987년 12월 월간조선>
  
  제1부 폭풍전야
  
  수경사령관 교체
  
  鄭昇和대장이 1979년 10월27일 새벽에 계엄사령관이 된 뒤 맨 처음에 한 군 인사는 참모차장의 교체였다. 金載圭가 朴正熙대통령 살해범인으로 구속됨으로써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 후임에 정부는 이희성(李熺性) 육군참모차장(중장)을 부장서리로 임명하였다. 1979년 10월30일자였다. 이 인사는 정총장이 노재현(盧載鉉) 국방부장관과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었다. 후임 참모차장으로서는 육사9기 출신으로서 ○군단장이던 윤성민(尹誠敏) 중장을 임명했다. 정총장은 『서열상으로는 차장감이 못되었지만 호남 출신 ,장성들이 군 수뇌부에 너무 적다는 말도 있어 특별히 중용하기로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尹군단장 후임으로는 전성각(全成珏) 수도경비사령관이 중장으로 승진돼 임명되었다. 요직인 수도경비사령관에 정총장은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인 장태완(張泰玩)소장을 임명했다. 정총장은 장소장이 수경사 참모장으로 일한 적이 있고 일선 사단장직도 거쳐 적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심복을 배치한 것이 아닌가」하는 얘기도 있었는데 정승화씨는 『장장군과는 아무런 개인적 친분관계도 없었다』고 했다. 당시 육본 헌병감 김진기(金晋基) 준장도 『정총장은 군내에 인맥을 만드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수경사령관으로 張소장을 임명하려고 하자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全斗煥 소장은 반대의견을 정총장에게 개진했다고 한다. 정총장은 또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이던 김복동(金復東) 소장을 부군단장으로 전보시키고 정동호(鄭東鎬)준장(당시 경호실 근무)을 경호실장으로 임명, 경호실을 축소, 격하시켰다. 그는 이어 수도권 안보에 있어서 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핵심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鄭柄宙)소장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장태완, 정병주 두 소장은 정총장과 마찬가지로 경북출신으로서 정규 육사출신이 아니다.
  
  정총장, 합수본부에 제동 걸어
  
  10월26일에서 12월 12일까지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의 업무추진 방향에 대해 몇 번 브레이크를 걸었다.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수사부문엔 있어서는 정보부, 검찰, 경찰까지 통합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보 보고의 루트 문제를 놓고 합수본부와 경찰 사이에 마찰이 빛어진 적이 있었다. 경찰은 직접 계엄사 치안처에 정보 보고를 하려고 했고, 합수본부는 자기들을 거쳐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총장이 교통정리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청와대 경호실 차장 李在田중장의 신병처리에 대해서도 합수본부에서는 기소를 원했으나 정총장은 법무감의 의견에 따라 기소각하, 예편으로 처리하였다. 합수본부에서는 또 부정축재자 일제 수사를 건의했으나 정총장은 혁명적 계엄이 아니란 이유를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대체로 정총장은 계엄군의 업무한계를, 치안유지로만 축소시키려 했고, 합동수사본부에서는 확대시키려 했던 것 같다.
  
  김대중 기피 발언
  
  11월26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언론사 사장들을 점심에 초대, 주목할만한 발언을 하였다. 『반공국가의 국군통수권자로는 용공 혐의가 있는 사람이 앉아서는 안된다. 국군 장교의 임용기준에도 용공의 과거가 있거나 협의가 있는 자는 장교로 임명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아마도 우리 국민은 그 누가 착공의 흠이 있는 사실을 안다면 절대론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을 것이다』이에 대해 한 언론계 사장이 『대통령에 입후보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
  중 구체적으로 누가 용공의 과거가 있는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정총장은 『김대중씨가 그렇다. 그는 전향한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어서 『김대중씨는 곤란하다는 견해는 육군참모총장 개인 의견인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정총장은『나의 개인 의견이지만 국군장병들은 모두 내 의견에 찬동하고있고, 따라서 국군의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고 했다. 『국민이 그를 뽑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정총장은 『당선된다면 할 수 없지만 김대중씨가 어떤 사람인지, 국민들이 안다면 설마 그를 뽑겠는가』라고 답했다. 정승화 총장은 다음날(11월27일)과 11월30일에도 편집국장들과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차례로 식사에 초대, 김대중씨에 대하여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정총장의 이 발언은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정총장은 중앙정보부장서리 이희성 중장이 갖다주는 김대중씨에 대한 정보철을 읽고 나서 충격을 받고 그런 발언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노재현 국방장관과 의논했더니 노장관은 『군인이 그런 정치적 발언을 하면 좋지 않으니 시기를 봐서 민간인인 내가 하겠다』고 말렸으나 정총장은 『국군통수권자의 자격에 관한 문제인 만큼 군인인 내가 말하는 것이 반응도 클 것이다』면서 그런 발언을 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12월 초순 정총장은 예하부대를 순시하는 자리에서도 군 지휘관들을 불러 놓고 김대중씨에 대한 기피발언을 훈시형식으로 했다. 합수본부에서는 김대중씨에 대한 자료를 복사, 배포했다.
  
  정치장교 숙청 여론의 대두
  
  12월6일 崔圭夏대통령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정식 취임을 앞두고 조각구상에 들어갔다. 11일 확정된 장관명단에는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유임하기로 돼 있었다. 이 조각에는 계엄군이 간여하지 않았다. 다만, 최규하대통령은 노국방에게 군 장성 한 사람을 내무장관으로 추천해달라고 했고, 노국방은 정계엄사령관과 의논한 뒤 金鍾煥 당시 합참의장을 추천했었다. 당시 계엄사 치안처장은 金晋基 육군본부 헌병감이었다. 12· 12사건 뒤 스스로 군복을 벗고 지금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살고 있는 金씨는 『12·12 직전 사회는 안정돼 있었다. 모든 국민들이 정부의 민주화 약속을 믿고 자중자애하고 있었다.
  
  당시의 범죄 통계를, 보면 각종 범죄도 줄어들고 있었다. 국가의 중대국면에 처해서 도둑들도 삼가고 있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의 군내 분위기에 대해서는 12·12사건의 주동세력과 반대세력의 이야기가 다르다. 정승화씨는『그 때 육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박대통령 시대에 권부의 주변을 맴돌면서 월권을 자행해 온 정치 군인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었다. 청와대 경호실, 공수단, 정보부, 보안사 등에 오래 근무했던 정규 육사출신 장교들이 거론되었다. 나는 이 여론이 표면화될 경우, 모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우리 군의 화합이 깨질까 우려하여, 12월 초순 전군을 순시할 때 지휘관들을 불러 모아 이를 무마하려고 애썼다. 나는 언젠가는「하나회」의 뿌리를 뽑아야 우리군이 정치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는 있었다』고 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가 생도일 때 처음 생긴 것으로 정규육사출신의 경상도 장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조직이었다. 尹必鏞, 朴鐘圭씨(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등의 후원을 받은 하나회소속 장교들은 승진과 보직 등에서 朴正熙대통령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全斗煥, 盧泰愚, 許三守, 許和平 등 12·12사건의 중심인물들은 거의가 하나회 소속이었다. 하나회는 尹必鏞소장이 1973년에 거세될 때 형식적으로는 해체되었으나 그 뿌리는 남아있었다고 정승화씨는 말했다.
  
  당시 정총장의 참모였던 한 예비역장성은 『일부 정치장교 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정총장에게 몇번 올렸으나 총장은 이를 무시해 버리더라』고 했다. 정총장은 『12월 6일 어느 모임에서 金致烈 법무장관을 만났는데, 정규 육사출신 장교들이 요즈음 군 인사의 적체현상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 같더라는 귀띔을 해주었다』면서 『당시의 군내 분위기나 나의 위치로 보아서 일부 집단에 의한 변란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승화씨는 『다만 일부 장군들이, 그들을 비호해주던 박대통령이 사라진 뒤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내가 그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盧泰愚민정당총재는 11월 12일의 관훈클럽 토론회, 1985년 4월 신동아와의 인터뷰 등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10·26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고 재판함에 있어서 큰 혼란이 있었읍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애국투사나 혁명가인 양 부각시키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군내에도 김재규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읍니다. 자칫 수사방향을 오도해서 김재규가 영웅이라는 방향으로 갈 조짐이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 대립되는 듯한 판국이었지요, 만약 이 두 주장이 맞부닥친다면 김일성이가 쳐들어 올 수 있는 틈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는 망쳐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수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셨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그런데 수사가 벽에 부닥쳤읍니다. 왜냐하면 합동수사본부장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이 박대통령 시해 당시 그 옆방에 와 있었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총장이 대통령시해에 이용되었고, 공모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었읍니다, 이런 모양을 보고, 또 군의 생리로 보았을 때 우리는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이 모든 직책을 다 내과야 한다고 생각했읍니다. 설혹 같이 모의를 한 형사적인 책임은 없다손 치더라도 도의적 책임을 스스로 져야 마땅하다는 거지요. 이런 분이 안 나가고 수사의 방향을 딴 데로 끌 고 가려 하니까 수사를 공정하게 진행할 수 없었던 거예요』이에 대해 정승화씨는 『12·12사건 뒤 김재규추종세력을 단 한 명도 적발, 처단하지 못했던 것은 군내에 그런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증거이며, 나는 시해사건 공판진행에 있어서 피고인들에게 최대한, 진술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지시밖에 내린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제2부 총장공관의 총성
  
  12·12의 시작
  
  유학성(兪學聖) 민정당의원은 지난 11월11일 12·12사건의 시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군내의 뜻있는 장성들은 정총장이 현직에 계속 있는 한 10·26사건의 완벽한 진상규명과 공정한 재판진행이 불가능하며, 어떤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하고, 합수본부장으로 하여금 이러한 내용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토록 하였다』그는 기자들과의 1문1답에서는 30경비단 본부에 여섯 사람이 모여 이 일을 추진했다는 것이었다. 1985년 盧泰愚씨는 민정당 당원교육장에서 특강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수사 책임을 지고 있던 총재각하(당시 소장)께서는 정승화가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의 직에 있었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했다. 수사관들이 공갈, 협박을 여러 차례 받을 정도였다. 긴급조치9호를 바로 해제함으로써 사회 혼란도 가중되었다. 수사과정에서 우려한 대로 김재규 일당이 정승화 장군을 배경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군대가 두쪽이 나서 싸우게 되는데 나라가 망하고 김일성이한테 진수성찬 차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고민을 전대통령 각하가 무척이나 했고, 본인도 같이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생각을 했으나 최종적으로 군에서 정승화 장군과 친했던 사람들의 뜻을 모아보자고 했다. 유학성, 박준병, 본인, 황영시, 차규헌 장군등이 모여서 건의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유학성 의원과 노태우 총재의 이야기는 약간 다르다. 여권측 자료와 본 기자의 취재를 종합하면, 12월12일의 행동은 노태우 총재의 설명대로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최초에 합의한데서 출발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12월8일은 토요일이었다. 정부측 12·12사건 자료에 따르면 전방에 있던 노태우 사단장은 전두환 소장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나와 보안사령부로 갔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비서실장 許和平 대령으로 하여금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에 관해 노사단장에게 브리핑을 하도록 지시했다. 이 브리핑은 2시간 가까이 걸렸다는 것이다. 노사단장은 이 브리핑에서 정승화 총장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돼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노 소장은 이날 세간의 여론을 취합하겠다는 생각으로 시내로 나와 옛날부터 잘 아는 신문기자와 몇몇 교수 등을 만나 여러가지 얘기를 들었다. 그가 다시 보안사령부로 돌아온 것은 오후 다섯시쯤 해서였다. 이날 전두환 합수본부장과 노태우 사단장은 12월 12일의 행동에 대해 합의한 것 같다. 이것이 12·12 의 시작이었다. 전본부장은 이날 거사일을 12일로 잡았다. 11일이 장군 진급 심사일이고 다음날 그 결과가 발표될 것이므로, 12일 저녁은 관례대로 군내의 곳곳에서 승진축하 회식판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무엇보라도 이날은 시해사건 공판의 사실심리가 끝나기로 돼있는 날이었다.
  
  여권측 자료에 따르면 노태우 사단장은 12월 9일 귀대하는 길로 곧장 직속 상관인 1군단장 黃永時 중장을 만났다고 한다. 이때 사단장은 황장군에게 『정총장에게 용퇴하도록 진언하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황장군은 그 자리에서, 그 모임에 나가기로 응락하였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정승화 총장은 태릉 골프장에서 노재현 국방장관과 함께 골프를 쳤다. 이 자리에서 그는 노장관에게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재규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월권과 마찰이 심해서 아무래도 안 되겠읍니다』이에 대해 노장관은『좀더 두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정 총장은 그때까지 군내의 정치장교 문제를 다독거리려고 애써 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서둘러 전장군 교체 이야기를 들 고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노재현 장관에게 한 정총장의 이 말이 새나갔다는 ,추측이 한때 있었다. 심지어 전장군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내려는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올렸는데, 결재가 늦어지는 사이 12·12 사건이 났다는 얘기도 돌아다녔다. 정승화씨는 결재를 올린 적은 없다고 말했다. 정승화씨는 『나는 노장관 이외의 다른 사람과는 그 문제를 의논하지 않았다. 그 말이 새 나갔다면 노장관 쪽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장관이 고의로 그 문제를 누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노총재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12·12전에는 그런 인사정보를 알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장군의 가세
  
  12월 8일 노태우 사단장이 돌아가고 난 다음,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육군본부 CID대장(범죄수사단장)인 우경윤(禹慶允) 대령을 오도록 했다. 육군 범수단장은 계엄사합동수사본부에 배속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대령은 개인적으로 전두환 본부장을 따르고 있었다. 전장군은 우대령에게 정총장의 연행 임무를 맡겼고 한다. 그 전에 이미 보안사 인사처장 겸 합수본부 총무국장인 許三守 대령은 정총장 연행의 책임을 떠맡아 두고 있었다. 육사 17기인 허대령은 육사졸업 뒤 휴전선의 관측장교로 4년간 근무한 것 이외에는 1965년부터 줄곧 수사기관인 보안사령부에만 근무해왔다. 1967년부터 3년 동안은 주월사령부 보안부대의 사이공 담당 대공분실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당시 부대장은 육사 11기의 金復東대령이었다. 유도 2단인 許씨 조사와 수사부문에서는 베테랑급이었다.
  
  1979년 3월 전두환 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전소장은 모군단 보안부대장으로 있던 허대령을 인사처장으로 임명하면서 사령부의「인사숙정」을 지시했다. 허대령은 이때 처음으로 개혁적인 차원에서 인원을 정리하고 조직을 정비하는 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이 숙정경험이 그 뒤의 「사회개혁 의지」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그는 말한 바 있다. 허대령과 우대령은 이날 저녁 연행방법에 대한 의논을 했다고 한다. 우대령은 자신이 준장진급심사에서 탈락된 것을 이때 이미 알고 있었다. 12월 11일 오후 전두환 장군은 차규헌(車圭憲)수도 군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군단장은 이 해 장군 진급심사위원장이었다. 차군단장은 이날 하루 종일 육본 회의실에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장군진급심사를 주재했다. 전장군은 차중장과 이날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내일의 모임에 나와달라는 전두환 장군의 요청을 차중장은 승낙했다. 전장군은 유학성(兪學聖) 국방부 군수차관보(중장)와도 접촉, 응락을 받아냈다. 이로써 수도권의 영향력 있는 고위 장성급(육군 중장) 3명이 12월12일의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수여단장들의 가세
  
  지난 85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당원교육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래서 12월12일 상기한 장군들이 모였던 장소가 경복궁이었다. 우리계획은 정승화 장군을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계시던 총리 공관에 모셔다가, 정승화가 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으로 버티고 있는 한 김재규 일당의 움직임과 모의를 분쇄할 수 없다. 이 수사상의 난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능률적인 길은 두 자리(총장, 계엄사령관)를 내놓는 길밖에 없다고 건의하자는 것이었다.
  
  두 자리를 내어놓는 대신 장관, 합참의장 등 어떤 자리를 정승화가 차지해도 좋다 고 말하려했다』유학성 의원은 「모시고 오려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연행」이란 표현을 썼다. 전본부장은 11일 제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소장(육사12기·현 민정당의원)과 백운택(白雲澤) 방위사단장(육사11기·사망)에게 전화로 내일 저녁 6시에 「생일집 초대」라는 암호로 경복궁 근방(제30경비단)으로 나오라고 일렀다고 한다. 수경사 예하의 두 경비단장인 張世東대령(육사16기·전 안기부장)과 金○○대령은 전장군의 직속 부하로 근무한 인연이 있어 이미 확실하게 그의 편에서 있었다.
  
  전본부장은 제○공수여단 여단장, 박희도(朴熙道) 준장(육사12기·현 육군참모 총장)과 제○여단장 최세창(崔世昌)준장(육사13기·현 군사령관), 그리고 제○여단장 장기오(張基梧)준장(육사12기·현 총무처장관)에게 「생일집 초대」에 대해 다짐을 해두었다. 이들은 특전사령부의 전신인 공수여단을 창설한 핵심요원들이었다. 특히 최세창 여단장과 장기오 여단장은 그들의 계급이 대위였을 적이던 1960년 6월에 미국 포트배닝 기지에 있는 미국 육군보병학교에서 우리 국군 사상 최초가 되는 레인저 특수교육을 선배인 전두환 대위와 함께 받은 인연이 있었다. 이때 한국 장교는 4명이었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포병간부후보 출신인 차지철(車智澈)대위였다.
  
  차대위는 이 교육을 마치고 공수여단에 근무하다가 다음 해에 5·16을 맞았다.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 당시, 박대통령의 직접 전화를 받고 정예요원들을 인솔, 북괴군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에서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내었던 朴熙道여단장도 1기선배인 전 본부장과는 군인이라는 관계 이전에 대구공고 선후배로 절대적인 인간적 신뢰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 이들 세 공수여단장들은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의 직속 예하 부대장이었다. 그들이 지휘하는 세 여단은 수도 근교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전투부대의 장악이 수도권 제어의 요체였던 것이다.
  
  12일 오후, 전두환 장군을 부르다
  
  12월12일 오전 10시, 정승화 대장 등 3군 총장은 국방장관실에 모여 장관과 같이 11시까지 중앙청으로 대통령을 방문하고, 인사서류를 결재 맡았다. 이 인사서류는 새로 장성으로 승진될 사람과 준장에서 소장으로 승진할 예정자 명단이었다. 그것은 육해공군별로 심사하여 각 군 총장의 제청으로 장관의 동의를 얻었고 대통령의 재가를 맡으면 확정되는 것이다. 매년 12월 초에 있는, 군으로서는 중요한 결재서류의 하나였다. 최대통령은 그때까지 중앙청 2층에 있는 국무총리실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부속실에 해공군 총장이 대기하고 노재현 장관과 정승하 총장이 먼저 육군의 승진자 재가를 받기 위해 들어갔다.
  
  최대통령은 처음으로 장성 승진을 결재하기 때문인지 신중하게 한사람 한 사람 승진 예정자들의 인사 기록카드를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정총장은 한 사람 한 사람 자세히 설명한 뒤 계급별 T/O와 연간 진급계획을 설명하고 그 계획에 따라 인선된 것임을 보고하였다. 최대통령은 별다른 말없이 기분 좋게 결재해 주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정총장은 곧 참모차장과 인사참모부장을 불러서 승진예정자들을 발표하도록 했다. 육군사관학교 제15기인 그의 둘째 처남 申○○ 대령(현재 소장)도 준장으로 승진될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총장은 이날 오후 장관실로 가서 김종환 합참의장을 새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추천하기로 노재현장관과 합의했다. 정총장과 노장관은 합참의장 후임엔 유병현(柳炳賢) 대장을, 柳대장의 후임엔 申현수 중장을 추천하기로 내정하였다. 두 사람의 화제는 김재규 사건 재판으로 옮겨졌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1심 재판도 이제 최후 진술만 남아 있으니, 예정대로 진행되면 1980년 4월 경에는 사형까지 끝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노장관이 『이왕이면 김재규가 최후진술에서 용공세력들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국민들에게 남긴다면 사형수가 죽기 전에 한 말이고 또 정보부장까지 지낸 사람이기 때문에 국민으로 하여금 반공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총장은 장관과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오는 즉시 전두환 소장을 사무실로 불렀다. 약 30분 후인 오후 5시쯤 전두환 소장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정총장은 전두환 소장에게 앞서 노장관과 나눈 이야기를 전하며, 김재규가 별로 말할 기분은 아니겠지만 국민들에게 용공세력에 대해 경계를 당부하는 말을 최후진술에서 할 수 있도록 그의 가족이나 변호사와 접촉해볼 수 없느냐고 했다. 전소장은 김재규의 현재 처지로 보아 어렵긴 하겠지만 가능한 대로 노력해 보겠다며 별다른 눈치를 보이지 않고 물러갔다.
출처 : 월조
[ 2003-07-15, 18: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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