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세 가지 기쁨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기쁨, 낯선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 주량(酒量)이 늘었을 때의 기쁨이다. 이 기쁨들의 이름을 지었다. 앞의 두 기쁨은 ‘위대한 발견’이라 하고 나머지 하나는 ‘건강 발전’이라 이름했다.
남인수 노래 ‘울며 헤진 부산항’이란 노래가 좋다. 가사는 애틋하고 훌륭하다. 저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마다 풀리지 않는 마음속 의문이 따라 나온다. 이 구절 때문이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난간 머리 흘러온 달빛.”
울면서 헤어진 부산항을 돌아보니라고 말했으니 그 뒷말 역시 슬픈 단어나 아니면 더욱 슬프게 하는 단어를 쓰는 게 문장 형식에 맞다고 친다. 그러기 위해서 주위 사물이나 풍경을 거기에 맞추어 가탁(假託)한다. 이를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 하고, ‘객관적 상관물’. ‘감정 이입’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저기에는 이런 방식과는 동떨어지게 ‘흘러온 달빛’을 쓴 탓에 앞부분의 슬픔을 도리어 낭만적으로 감미롭게 해버렸다고 말할 만한데 적어도 슬픔을 반감한 것은 틀림없다.
날고뛰는 작사자가 왜 이랬을까 하는 의문을 수년 동안 지녀왔다. 그랬지만 그 의문을 풀지 못한 나머지 “그냥 일부러 그랬겠지,”여기고 말았다. 그저께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노래를 듣다가, 나훈아가 부른 ‘울며 헤진 부산항’을 처음 보았다. 이 노래를 통해서 의문이 풀렸다. 기뻤다. 저 가사와는 다른 이런 가사를 만난 것이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난간 머리 사라진 항구.”
울며 헤어진 항구가 사라졌다고 함으로써 더욱 슬픔을 자아낸다. 인간적 이별에 풍경적 이별까지 보태졌다. ‘사라진 항구’를 가탁한 효과다. 누군가가 나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흘러온 달빛’을 빼고 그 자리에 ‘사라진 항구’를 넣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문학적 표현으로서는 '흘러온 달빛'이 좋다. 그러나 '흘러온 달빛'은 어디서든 다시 볼 수 있지만 사라진 부산항은 다시 보기 어렵다.
세상사란 참 우습다. 그토록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한번 풀리니까 연달아 풀렸다. ‘연락선 난간 머리’가 아닌 ‘연락선 파도 넘어’ 사라진 항구로 개사한 노래를 또 발견했던 것이다. 원곡과는 다른 노랫말로 개사(改詞)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고서야 개사할 까닭이 없다. 그리고 개사된 노랫말이 많다는 것은 원곡이 대단함을 의미한다.
하나의 의문이 풀리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저 두 개의 다른 가사 곧 ‘흘러온 달빛’과 ‘사라진 항구’ 중에서 어느 것이 원곡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끙끙대며 애쓰다가 어제야 ‘흘러온 달빛’이 원곡임을 알게 됐다. 궁금증이 풀려서 또 기뻤다. 이 이외에도 내가 만나지 못한, 다르게 개사된 노랫말이 또 있을 것이다.
어느 노랫말이 원곡인지 알아보는 과정에서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는 것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인간 두뇌는 의문스런 미완의 과제를 완성된 과제보다 오래 기억하고 계속 떠올린다는 것이다. 이 효과를 탐하여 '흘러온 달빛'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연이은 ‘위대한 발견’이었다. 자축하기 위해 한잔해야겠는데 할지 말지는 모르겠다. 해가 넘어가고 술시가 돼야 안다. 술꾼의 마음은 여자의 마음과 같아서 자기도 자기 마음을 모른다.
'흘러온 달빛'과 '사라진 항구'의 차이
- 무학산(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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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8, 09: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