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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내 김호남
 첫 아내 김호남
 
 박정희는 문경으로 부임하자 문경공립보통학교 바로 앞에 있던 전경준 학생의 집에서 두 달쯤 하숙을 하다가 가까운 김순아 여인 의 집으로 옮겼다. 문경보통학교 제자인 전경준의 기억으로는 박 선생은 침구나 방안의 정리 정돈을 깔끔하게 하고 복장이 항상 단 정한 사람이었다. 김여인은 30대 후반으로서 한때 주막을 겸한 음 식점을 운영하다가 그때는 하숙만 치고 있었다. 박정희보다 한 살 아래인 임창발이란 아들을 둔 과부였다.
 
 한 달 뒤 문경군청 농회 기사인 허동식이 아래채에서 하숙을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한 달 하숙비로 8원씩 냈다. 박정희의 초봉은 월45원이었다. 박정희는 이때부터 막걸리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대구사범은 기숙사에서 흡 연은 허용했으나 음주는 금했으므로 박정희는 교사시절부터 본격 적으로 막걸리를 즐기게 된 것이다. 동갑인 박, 허 두 사람은 집 으로 돌아오면 술판을 자주 벌였다. 몇년 전 작고한 허동식은 10 여년 전 기자에게 이런 추억담을 남겼다.
 
 '저는 대구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임하였습니다. 박정희의 첫 인상은 꾀죄죄하면서도 눈초리가 다부졌습니다. 곧 친해졌지요. 지금 되돌아보면 거의 매일 술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와의 기 억은 술마신 것이 거의 전부에요. 막걸리를 바케스로 받아놓고는 쪽박을 뛰워놓고 허연 배추와 된장을 안주삼아 마셔댔어요. 하숙 집 여주인도 가끔 끼여들었어요. 박정희는 평소엔 말이 적었지만 술만 들어가면 말도 좀 하고 어허허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잘했 어요. '황성옛터'도 뽑고요. 집안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아 결혼 한 줄은 몰랐습니다. 방학을 해도 집에 잘 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 됩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문경시절의 막걸리 맛을 그리워 하는 말을 자주 했다. 부속실장 박학봉에 따르면 박대통령은 아주 실감 있게 그 상황을 묘사하더라고 한다.
 
 '여름에 말이야, 밀집모자 쓰고 수건을 어깨에 턱 걸치고 새재 (조령)를 쉬엄쉬엄 넘어가다가 주막에 들르지. 풋고추와 된장을 내어놓고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면 그 기분이 최고야.'.
 
 하숙집 여주인 김순아와 두 하숙생은 허물없이 지냈다. 그런데 김씨는 박선생한테는 꼼짝을 못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에게는 생선 의 몸통을 주고 허동식에게는 꼬리만 주어 허씨가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김씨의 아들 임창발은 '박선생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 다'고 기억한다. 사람을 대하는 데도 좋고 나쁘고가 너무 분명했 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어를 의식적으로 덜 쓰려고 애썼다. 하루는 일본교사와 싸웠던듯 하숙집에 돌아와서는 허동식에게 '그 새끼를 그냥 때려죽이려다가 놔두었다'고 씩씩대면서 말했다. 허 동식과 임창발이 보기에는 박정희는 가정에도, 여자에도 별 관심 이 없는 사람이었다.
 
 박정희 선생이 부임한 해에 담임한 3학년 반 여학생들은 박선 생이 총각일까 기혼일까로 궁금해하였다. 한번은 서광옥(74)등 여 학생들 몇명이 박선생의 하숙집에 놀러갔다. 방 한 구석에 놓은 베갯모에새 두 마리가 수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여학생들은 신혼 부부들이 쓰는 베개라고 판단했으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박선생 은 끝까지 학생들에게 '결혼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혼자 문경에서 하숙을 하는 사이에 아내 김호남은 관습에 따라 1년간 친정집에 머물렀다. 부모들끼리의 결정에 의해서 생면부지 로 부부가 된 사람들이 서서히 친밀해지도록 고안된 이 기간에 박 정희는 손님처럼 가끔 와서 며칠씩 자고 가곤 했다. 그들은 '낮에 는 남처럼 밤에는 님처럼' 살아야 했는데 밤에도 남처럼 사는 편 이었다. 1년이 지나자 김호남은 상모리의 시댁으로 옮겼다. 남편 이 문경으로 혼자 가버리는 바람에 외롭게 시집생활을 시작했지만 시어머니 백남의(백남의)는 며느리를 끔찍이 아껴주었다.
 
 1937년11월24일(음력10월22일) 김호남은 큰 딸 재옥을 낳았다. 박정희는 딸을 본 뒤에도 아내에게 냉정했다. 아버지가 강권하여 시킨 결혼이었던 데다가 역시 2년제 간이학교 출신인 아내와는 문 화적인 격차가 있었다. 박정희는 방학 때 고향에 들러도 아내와 같은 방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보통학교 동기인 이준상(작고),장 월상의 집에 자는 일이 많았다. 이준상의 어머니와 박정희의 어머 니는 친한 사이였다. 이준상의 동생 이일상(67)에 따르면 두 어머 니들이 박정희 부부 문제로 걱정을 하다가 하루는 박정희를 강제 로 아내의 방에 밀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두 어머니가 밤새도록 문앞 섬돌에 앉아 보초를 섰다 고 한다.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큰 아들 재석은 작은 삼촌이 큰 삼 촌에게 혼이 나는 것을 보았다. 여름방학 때 문경에서 구미로 온 박정희는 친구들과 놀러다니기만 했다. 박상희는 구미역전 뒤에 있던 자신의 집으로 동생을 불렀다.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6척장신인 그는 작은 동생을 달랑 들어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문고리를 잠그어버리는 것이었다. 박재석은 겁이 나서 마당에 서 있었다. 김호남도 달려 왔다. 방안에서 노성과 매질소리가 동시에 들려 왔다.
 
 '니는 임마 뭐하는 놈이고. 재수씨가 재옥이를 혼자서 키우면 서 저 고생하고 있는데 모처럼 와서는 한 방에도 안자고 어디로 돌아다니노. 월급을 45원이나 받는다는데 그건 다 어디에 썼노.'.
 
 김호남은 남편이 맞아죽는 줄 알고는 문에 매달려 울면서 사정 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날 박정희는 사라져버렸다. 문 경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이즈음 박상희는 지방언론인의 신분 으로 사업에도 성공을 하여 집을 세 채 샀다. 그 중 한 채를 어머 니에게 주어 며느리 김호남과 함께 살도록 했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이 1938년9월4일에 68세로 사망했기 때문에 백남의는 외로 운 며느리와 함께 따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감상을 남긴 적이 없 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아버지에 대 한 그것은 좀 차게 느껴진다.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에 부임한 다음해인 1938년에는 2학년생 20명과 5학년생 40명을 한 교실에 수용하는 복식반을 담임하게 되 었다. 박선생은 함성백 등 5학년생들에게는 '너희들은 형이니 먼 저 복습하라'고 한 뒤 2학년생들부터 가르쳤다. 처음 며칠 동안엔 웅성웅성하여 서로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곧 적응이 되어 2 학년생과 5학년생들이 모두 우수한 시험성적을 내게 되었다. 박정 희는 수업을 엄하게 진행하였다. 과제를 내주고는 항상 검사를 했 다. 숙제를 해오지 않은 아동들에게는 적당한 벌을 주었다. 그는 또 월요일마다 공책검사를 했다. 대구사범에서 배운대로 일기와 편지쓰기도 권했다.
 
 박정희는 사실상 이 학교의 체육담임선생이었다. 운동회에 대 비한 훈련과 출전팀의 지도를 도맡아 했다. 박정희가 지도하는 팀 은 2등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주로 1등을 했다. 조례 때는 박 정희가 사회를 보았다. 교장의 훈시가 있은 후에는 박선생이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데 항상 간단명료하게 말하였다. 이해 봄소풍 때 는 조령제1관문까지 걸어올라갔다. 함성백은 다리가 아파서 걷지 못하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소년을 업고서 올라갔다.
 
 도시락을 사오지 못한 어린이들과는 나누어 먹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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