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교사들과의 애증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간 동기를 미화하기 위해서 그가 일본인 교 장및 교사들과 자주 싸웠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사 실은 박정희는 착실한 교사였다. 교실에서는 조선어를 쓰지 않았고 교육 방침에도 충실했다. 일본인 교사들 하고도 잘 지낸 편이었다. 다만 민족 차별로 갈등이나 충돌이 없을 수 없었으나 이는 예외적인 것이고 논쟁수 준이었다.
그는 항일의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고 일제통치에 대 해서 정면으로 도전하지도 않았다. 항상 단정하고 빈틈 없는 언동을 하 는 박선생을 일본 교사들은 좀 어려워했다. 제자들의 증언에는 박정희와 일인교사 가토의 충돌이 자주 등장한다. 박선생이 문경보통학교로 부임 한 해에 5학년이었던 강석해(75)의 증언.
'가토 선생은 직업 시간을 맡고 있었습니다. 직업 과목이란 작업을 말하는 겁니다. 여학생들은 재봉을 배우거나 실습장에서 누에를 치고 남 학생들은 모심기나 산지개간이었습니다. 하루는 박선생의 조선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가토 선생이 먼저 와서 우리를 작업장으로 내몰았습니 다. 그때 박선생이 들어오다가 가토와 마주쳤어요. 박선생이 '왜 조선어 시간인데 일을 시키려 하느냐'고 대어들어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하 는 바람에 우리는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토(가등) 선생을 학생들은 '가등가등, 가릉가릉'이라고 놀려댔다.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가릉가릉'하고 한자음을 빌려와 '가등가등'.박 정희가 첫해에 담임했던 3학년반의 급장이었던 주영배(74·전 초등학교 교장)의 목격담--. 일본 천황의 생일이라고 하여 운동장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가토가 일장기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오늘 땅에 떨어진 국기를 학생들이 밟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 는 그것을 보고 눈물이 났다.'.
행사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가는데 박선생이 일본말로 가토에게 따지 는 것이었다.
'가토 선생, 참말로 눈물이 났소?' '뭐, 그렇다기보다는 아이들한테 가르치려다가 보니까...' '선생이 거짓말로 가르쳐서야 아이들이 우리를 믿겠습니까.'.
가토는 웃으면서 박선생의 등을 툭툭 치는 것이 주영배가 보기에는 그의 기분을 맞추어주려는 것 같았다. 제자 전도인은 이런 증언을 남겼 다('이락선비망록').
'어느날 나와 몇 아동들이 놀고 있는데 교무실 현관에서 노성이 들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한 일본인 중년신사가 박정희 선생님을 화나게 했었다 는 것이다. 이 일인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어이, 교장은 있는가'라고 박정희 선생에게 물었다. 박선생은 불손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다시 그 일본인 이 '어이, 교장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렇게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너희 일인들은 말끝마다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기껏해서 이런식으로 조선사람들을 대할 수밖에 없는가. 일등국민이라 자칭하고 싶거든 먼저 교양 있는 국민이 되어라.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오는 것부터 고쳐 라.''.
박정희는 몸이 작은 데다가 교무실에서는 출입문에 가까운 말석에 앉 았기 때문에 손님들이 가끔 사환으로 오해하였다. 1939년도 졸업앨범을 보면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 교직원이 교장과 급사 두 명을 포함하여 11명임을 알 수 있다. 9명의 교사중 조선인은 네 명으로서 박정희 박옥 희 권봉원 유증선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의 눈에는 스즈키, 다카네사와 두선생이 좋은 사람으로 비쳤다.
이 두 사람과 박정희는 무척 가까운 듯 했다. 스즈키와 박정희는 어린이들이 보는 가운데서 달리기 시합을 자주 벌였다. 박정희는 스즈키를 먼저 출발시키고는 '자, 간다'라고 소리치면 서 달려가서 추월하곤 했다. 대구사범의 히라야마 교장이나 기시 교사처 럼 문경에서는 지금도 스즈키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기억하고 있는 70대 노인들이 많다. 박명래(73·전 점촌초등학교 교장)와 백찬기(73·전 전 매청 공무원·재경문우 장)는 스즈키 선생의 지도로 과외수업을 하면서 대구사범 진학시험에 대비하였으나 낙방했다.
백찬기는 실의에 빠져집에 서 농사일을 거들고 있는데 스즈키 선생이 학교로 불렀다. 스즈키는 백 찬기에게 '너는 우수한 학생이니 꼭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면서 재 수를 권했다. 그 이듬해 백찬기는 대구농림학교에 합격하였다. 박명래는 스즈키 선생이 시키는 대로 1940년1월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지 금까지 멈추지 않고 있다. 해방후에도 문경주민들은 일본인 교사들을 잘 보호하여 무사히 돌아가도록 했다.
대구사범 동급생들 사이에선 박정희가 '입을 꽉 다물고 골똘한 생각 에 빠진 침울한' 학생이었지만 문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그는 '잘 웃기 고 잘 놀아주는' 동심을 가진 '알라(아이) 같은 선생님'이기도 했다. 서 울공대를 졸업하고 문경군수를 지낸 김익진(73)은 이런 기억을 갖고 있 다.
'겨울이었습니다. 체육시간은 언제나 마지막 시간인데 그날은 눈이 펑펑내리고 있었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박선생이 약속했어 요. '누구든지 눈을 손바닥에 잡아오는 사람은 집에 먼저 보내준다'. 우 리는 눈송이를 잡아서 선생님한테 갖다드리려고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맨손으로 눈을 잡아 선생님한테 달려가 손을 벌리면 물이 되어 있었습니 다. 그러면 또 뛰어다니고. 어느새 추위를 잊어버렸습니다.'.
박선생이 좋아서 졸졸 따라다닌 것은 아무래도 붙임성 있는 여학생들 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박정희의 3학년 담임반 출신 세 명이 유별났다. 강신분 서광옥 어유남. 이 세 학생에게는 그 유명한 박선생의 나팔소리 가 '우리 좁쌀 친구들아,나 여기 있으니 놀러와'하는 신호로 들렸다.'총 각선생'이 주로 기거하던 숙직실로 놀러가면 꼭 과자를 내놓으면서 자상 하고 유쾌하게 놀아주는 것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박선생이 자주 부르던 일본유행가를 강신분(서울 거주) 할머니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꽃도 폭풍도 밟고 넘어서 / 걷는다 남자의 길 / 울지말아주게 새들 아 /차가운 달 아래서 홀로 걷는다'.
이 유행가는 '애염의 계수나무'(가와구치 마쓰다로 지음)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동명의 영화 주제가 '밤바람 속을 가다'이다. 이영화는 박정희가 문경에 온 다음해인 1938년9월부터 일본과 조선에서 상영되기 시작하여 큰 인기를 모았었다. 박정희는 일제에 대한 울분을 삼키고살면 서 한쪽으로는 그 일본문화를 호흡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신분은, 교실 에서는 '남자는 3년에 한번 웃어야 한다'고 말하던 무서운 박선생이 좋 아서 양말이나 베갯잇을 빨아주는 심부름을 시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 었다.
강신분은 박정희가 하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미국사람들은 자동차를 한 집에서 한 대씩 갖고 있고, 일본사람들은 자전거를 한대씩 갖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지게도 하나씩 가질 수 없으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강신분은 방학이 시작되면 2-3일 뒤에 어김없이 나타나던 할머니 한 분을 기억하고 있다. 작고 예쁘장한 할머니가 명주수건을 단정하게 쓰고 운동장에 나타나 자신을 부르더니 박정희를 찾더라는 것이다. 이 할머니 만 나타나면 박선생은 그 다음날 고향에 내려갔다가 1주일도 안되어 다 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이 할머니는 물론 어머니 백남의였다. 방학이 되어도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구미로 내려올 생각을 않고 있는 박정희를 매번 데리러 오는 것이었다.이것은 나중에 깨달은 일이고 제자들은 5·16 혁명 때까지는 당시 박선생이 기혼자인 줄 몰랐다고 한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