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
만주국은 일본의 관동군이 만들어낸 괴뢰국이었다. 그 산파역 은 관동군의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였다. 전략사상가이기 도 했던 이천재적인 참모는 '만몽문제 해결안'이란 논문에서 이 렇게 썼다.
'일본이 동양의 선수권자이기 위해서는 만몽을 우리의 영토로 하는 외에는 절대로 다른 방도가 없다. 이에 의해서 대소전에 유 리한 근거지를 마련하며, 배일공산운동의 조선침투를 막음으로써 조선지배를 튼튼히 할 수 있다. 이것은 명치유신 후 10만의 생명 과 20억엔의 국비를 투입한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하는 길이다.'.
1931년 9월 18일, 이시하라와 그의 직속상관인 관동군 고급참 모 이타가키 세이시로(뒤에 조선군사령관·도쿄전범재판에서사형) 는 만철선 폭파사건을 조작하여 중국군을 공격하는 빌미를 잡았 다. 이것이 만주사변의 단초가 되었다. 그 두 달 뒤에는 일본의 봉천특무기관이 천진폭동을 조작하였다. 1932년3월까지 관동군은 만주의 거의 전역을 점령했다. 멸망한 청나라의 선통제였던 부의 를 모셔와 황제로 삼고 만주제국을 발족시킨 것은 1932년 3월1일 이었다. 당시 일본군대는 군령권은 내각에 속하지 않고 바로 천 황에 직속한다는 논리를 개발하였다.
엘리트 참모장교들은 천황이 일일이 작전에 간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만주로, 중국본토로 전선을 확대해 나가다가 결국은 태평양전쟁으로 몰고간 것이다. 만주사변의 주모자인 이시하라는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에는 반대 했다. 이 때문에 그는 거세되었고 그 덕분에 전후에 전범재판을 면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4월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생으로 입학한 박정희 등 조선인 생도 11명은 주보에서 13명의 조선인 1기생도들과 상견례를 했다. 그 며칠 뒤 1기생들이 모여 서 회의를 했다. 그들은 2기생 후배들을 지도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누구를 혼내줄까를 결정하는데 박정희와 김재 풍이 뽑혔다. 김재풍은 미남이라서, 박정희는 단단하게 생겨먹었 기 때문에 뭔가 건방지게 보인다는 여론이 나온 것이다. 간도 용 정의 광명중학교 출신 방원철이 나서서 '내가 손을 좀 봐주겠다' 고 자원했다. 며칠 뒤 토요일을 잡았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방 원철은 두 사람을 내무반 숙사 뒤 건설자재가 흩어져 있는 으슥 한 곳으로 불러냈다.
'너희 두 놈이 왜 여기 불려왔는지 모르겠지. 우리 선배들 사 이에서 너희들은 태도가 건방지고 예절이 형편없다는 불평이 수 차례 나왔다. 오늘은 선배의 기합맛을 보여주겠다. 입 다물어!'.
기골이 장대한 방원철은 주먹으로 따귀를 갈기기 시작했다.김 재풍은 옆으로 쓰러졌다. 박정희는 달랐다. 주먹을 받고 몸이 옆 으로 밀렸다가도 금방 원래 자세로 돌아와서 딱 버티고 서서 다 음 타격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몸이 용수철 같았다. 방원철은 속 으로 '야, 여기 독한 놈 하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더 세게 때렸다. 그래도 고개를 치켜들고 펀치를 받아내는 박정희가 꼭 차돌 같고 뱀대가리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방원철은 두 후배에 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일계 만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민족투쟁을 전개 하고 있다. 학교생활에 있어서 어떤 경우라도 그들에게 지면 안 된다. 알았나!' '예!'.
두 사람은 이것이 단순한 구타가 아니라고 깨닫는 듯했다. 방 원철은 미래의 대통령을 갈긴 이 첫 경험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만큼 박정희의 얻어맞는 태도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박정 희로서도 이 첫 경험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해방후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그 방형 손때가 참 맵습디다'라고 농담을 했다. 박정희의 동기생들을 혼내는 데 앞장섰던 1기생은 박임항 과 최창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정열적이고 민족의식이 투철했으 며, 인간적인 매력이 많았다. 이들의 구타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악발이 근성을 심어준다는 것이었다.
방원철은 '후배들을 무섭게 다룬 만큼 아껴주기도 했 다. 그러다가 보니 정이 들었다'고 했다. 5·16에서 드러났던 만 주군관 출신들의 유별난 결속력, 그 한 가지 비결은 '우정어린 구타'로 맺어진 끈끈한 인간관계였다.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구타라는 피부접촉이 예기치 않은 효과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용케도 이 수모를 견디어냈다. 나이가 4∼6세나 아 래인, 소년같은 1기생들로부터 그렇게 얻어맞고도 박정희는 평생 선배 대접을 해주었다. 그는 해방 뒤 자신보다 나이도 적고 계급 도 낮은 1기생들에게 꼭 '방형!'식으로 존대를 했다. 이재기는, 동기생 박정희가 어느 일요일 외출을 갔다가 돌아와서 잠자리에 누웠다가 최창륜 선배한테 불려나가 실컷얻어 맞고 오는 것을 보 았다. 박정희는 울상이 되어 하소연을 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1기생 이기건(육군준장 예편)도 박정희와의 첫 대면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기건이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다. 박정희가 당돌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놈 보기 싫어 왔소.'.
이기건은 '왜놈'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북한지역에서는 대체 로 '일본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정일권(작고·전 육군참모 총장, 국회의장)은 그때 만군 상위(대위)로서 신경에 근무하고 있었다. 박정희 생도는 방학 때 자주 정일권을 찾아갔다. 정일권 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현역장교에게 나오는 배급술을 박정희 가 다 비우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1917년생이 었다. 생일로는 박정희가 1주일 빨랐다. 둘 다 가난한 어린 시절 을 보냈다.그래서 대화의 공감대가 넓었다.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어느날 박정희는 정일권, 박기병(당시 관동군 하사관·육 군소장 예편), 그리고 군관학교 생도들이 있는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선배님들, 이 노래 모르시죠'라고 하더니 주먹질을 하면서 노래했다. 들어보니 독립군 노래였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