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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도
 무사도
 
 1942년3월23일에 만주국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만계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 뒤 다섯 달 동안 '다이츠키'교육을 받았다. 다이츠키교 육이란 것은 사관후보생들이 일선부대에 배속되어 사병과 하사관들의 생활을 체험한다는 취지였다. 이것은 독일군제를 받아들인 일본군의 사관양성법이었다. 박정희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부대에서 교육을 받았다.
 
 만주군관학교 2기 예과졸업생들 중 일계전부와 만계 생도들 중 성 적이 우수한 70여 명이 선발되어 일본육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만 계에 속했던 조선인 생도 11명중 박정희 이한림 이섭준 김재풍이 유 학생으로 뽑혔다. 이들은 1942년10월에 도쿄 근방 가나가와현의 자마 에 있던 일본육사 본과3학년에 입학하여 유학생대로 편성되었다.
 
 사이타마현 아사카에 있던 예과(1-2학년) 교정은 진무대, 본과(3-4학년) 교정은 상무대라 불렸다. 박정희가 속한 유학생대는 정규 일본육사 57기와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같은 과정을 공부했다. 58기부터는 유 학생대가 정규반에 통합되었다.
 
 일본육사에서는 한문공부를 많이 시켰다. 일본은 명치유신 직후 육 군은 프랑스 제도를, 해군은 영국식을 모방하였다. 프랑스가 19세기 말 독일과의 전쟁에서 지자 육군은 독일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그 러면서도 일본의 장교는 동양적인 교양과 무사도 정신을 지켜가야 한 다는 뜻에서 중국의 고전을 읽게 하고 서도를 배우도록 하여 편지도 반드시 모필로만 쓰도록 했다. 화혼양재, 즉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되 어디까지나 일본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는 주체적인 근대화의 전략 이 깔려 있었다.
 
 박정희의 동기생 이섭준(작고)은 한문교관이 이런 말을 하던 기억 을 갖고있었다.
 
 '다카키(박정희)의 작문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그의 일기장을 검열한 교관도 비슷한 평을 했다. 박정희 생도의 하 루는 아침 6시에 일어나자마자 2㎞를 구보하여 오다케 신사로 참배하 러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군인칙유를 큰 소리로 외운다.
 
 '군인은 충절을 본분으로 삼는다 / 군인은 예의를 숭상한다 / 군인 은 무용을 숭상한다 / 군인은 신의를 지킨다 / 군인은 질소를 본지로 삼는다'.
 
 박정희 같은 식민지 세대는 교육칙어도 달달 외워야 했다.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의리, 부부간의 상애, 붕우 간의 상신'을 강조한 이 내용 자체는 화랑도의 세속5계와 비슷하다.
 
 교육칙어를 만든 사람들중에는 지성을 강조한 이퇴계사상을 연구한 이들도 있어 교육칙어에 퇴계의 철학이 많이 들어 있다고도 한다. 박 정희는 군인칙유나 교육칙어가 지향하는 '황민화'에는 반감을 가졌지 만 이칙유나 칙어가 담고 있는 동양적인 혼과 도덕관에는 동감했던 것같다.
 
 박정희는 일본육사에서 무사도 정신의 정수를 발견했다. 그가 교육 을 받았던 1942∼44년에는 이미 대평양전쟁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 가고 있었다.
 
 박정희가 4학년이던 1943년 11월 23일 중부태평양의 타라와섬에서 는 상륙한 미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던 일본군 수비대가 패색이 짙 어지자 항복을 거부하고 집단자살(소위 옥쇄)했다. 수비대 5천5백여 명 가운데 포로로 잡힌 것은 조선인 1백29명을 포함한 1백46명에 불 과했다. 타라와 옥쇄 하루 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수상, 장개석 중국총통은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 하면서 만주와 대만의 반환과 조선독립을 약속했다.
 
 박정희도 이제는 일본의 패망은 조선의 독립을 의미한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 다. 일본육사는 줄어들고 있는 장교들을 보충하기 위하여 매기의 생 도수를 2천명 이상으로 늘렸다. 박정희보다 1년 뒤에 졸업하여 전쟁 에 투입된 기간이 다섯 달밖에 되지 않는 58기출신 가운데 항공사관 (당시 일본에서는 공군이 따로 없었다)은 약8백명이었다. 그 가운데 약 3분의 1이 주로 카미카제 자살공격에 동원되어 전사했다.
 
 이런 비장한 분위기속에서 육사교육을 받은 박정희는 끊임없이 죽 음과 무사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보다 한 기 후 배인 58기 출신 정래혁(국방장관 역임)은 '무사도란 즉, 죽는 것이다' 고 배웠다고 했다. 무사를 뚜렷한 사생관과 국가관을 가진 군인집단 으로 정의한다면 동양3국에서 가장 오래된 무사단은 서기 6∼8세기에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되었던 신라 화랑도였다. 어느 나라든 무사도 의 본질은 인명경시가 아니라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어떻게 하면 대의를 위해서 값지게 쓸 것인가 하는 엄격한 자기 다짐이다.
 
 박정희가 여러 번 죽음과 맞딱뜨렸을 때 보여준 초인적인 의연함은 이런 무사도 교육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정희가 재학중일 때 육사교장은 우시시마중장이었다. 가고시마 출신인 그의 셋째아들이 56기로 육사에 다니고 있었다. 아들이 전하는 아버지의 가훈은 이러 했다.
 
 '무사도에 뜻을 두고서도 조의(조잡한 옷) 조식을 싫어하는자는 아 직 멀었다. 항상 전장에 있어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솔선하라. 남에게 폐를 끼치지말라'.
 
 우시시마 중장은 오키나와 주둔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1945년 4월에 상륙한 미군 13만명을 맞아 석달간 싸웠다. 그는 6월 23일 동굴 지휘소에서 참모장과 함께 할복자살했다.(계속).
 
 (조갑제 출판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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