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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졸업
 수석졸업
 
 박정희가 군인이 되려고 했던 기본적 동기는 무엇보다도 '긴 칼을 차고 말을 달리며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군 인이 되어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의 힘을 비축하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총구의 힘을 이용하여 독립이 나 국가개조를 하려는 생각의 씨앗은 아마도 만주군관학교의 연병장 에서 그 최초의 싹을 틔웠을 것이다.
 
 군대를 단순히 전쟁수단으로 보지 않고 정치의 수단으로 보게되는 쪽으로의 시각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가 딛고 있었던 만주국이 우선 일제 관동군의 작품이 아니었던가.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만주사변을 기획하였던 이 시하라간지 같은 청년장교들에 대한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 던 때였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5학년 때 일어났던 1936년의 2·26사 건은 그에게 중요한 화두를 제공해 주었다.
 
 이소베, 안도, 다케시마 같은 30대 초반의 가난한 농촌출신 대위 들이 주동이 되었던 이 거사는 그 동기가 군국주의적 책동과는 성격 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대륙 침략정책에 희생되고 있던 농촌의 현실 을 농민 출신 부하 사병들의 비참한 경험담을 통하여 알게 된 이 청 년장교들은 천황에 직접 호소하여 이른바 '소화유신'을 단행함으로써 관료화된 군상층부를 숙청하고 사회적 모순을 일거에 해결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군 내외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도쿄의 요 충지를 점거하였으나 거사 초반에 사이토 내무대신(조선총독 역임), 와타나베 육군교육총감, 다카하시 대장대신 등 요인들을 죽이고 스즈 키 시종무관을 중상에 빠뜨림으로써 천황의 노여움을 샀다. 그들은 도쿄 근방의 부대에서 동원한 1천5백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천황이 '반도'라고 규정하자 자살하거나 투항해버렸다.
 
 2·26사건을 주동한 장교들은 만주사변을 주동한 엘리트 참모들과 는 달리 농민출신 사병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동감 했던 일선부대의 장교들이었다. 이런 사건의 성격은 가난한 농민출신 의 장교후보생인 박정희의 주의를 끌 만한 것이었다. 더구나 만주군 관학교에는 2·26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밀려나서 온 장교들이 교관이 나 구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침략적 군국주의와는 성격이 다소 다른 아시아주의자의 성향을 갖고 있어 민족차별 의식이 덜했다 (2·26주모자들은 만주사변의 주모자 이시하라 간지를 암살 대상자 명단에 넣어놓고 있었다).
 
 박정희가 좋아했던 만주군관학교의 중대장 간노히로시와 일본 육사의 사카키 구대장이 그런 장교들이었다. 이런 장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도 박정희는 '국가개조의 수단으로서 총구 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을 것이다.
 
 군대, 권력, 개혁이 하나의 화두로서 그의 가슴 속 깊숙이 자리잡 으면서 그는 더욱 과묵해졌다.
 
 간노히로시 소교(소령)는 2·26사건에 가담했다가 파면된 뒤 만주 군 장교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인 생도들에게 관심이 많았 다. 어느날 1기생 방원철 최창윤 강재순을 자신의 관사로 초청했다. 점심을 대접하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너희들 조선독립을 원하지? 앞으로 독립운동을 열심으로 하게. 그러나 지금은 적당한 시기가 아니야.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 때 독립운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해.'.
 
 박정희의 동기생 이한림(1군사령관과 건설부장관 역임)은 '또렷한 특색을 지닌 박정희 생도'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증언을 남겼다(회고 록 '세기의 격랑').
 
 '조그마한 체구이지만 어깨를 딱 벌리고 당당하게 걷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결심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 사이는 혈우라고 할 만했다. 특히 나에게 감명을 준 것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그 불굴의 정신이었다.
 
 동기생 이병주는 만날 때마다 나를 혼돈시켰다. 자신은 무신론자 라고 하다가 끝에 가면 공산주의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는 체질적으 로 공산주의에 젖어 있었다. 나는 이병주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되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가끔 그와 어울리며 그의 말을 반박하 지 않는 태도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만계와 일계의 교관이었던 오다카 가쓰에(뒤에 일본 사관전자센 터 사무장)는 1941년 가을 종합연습 때의 박정희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다카 교관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계속되는 행군훈 련때 소대장이었고 박정희는 그 아래 분대장이었다. 오다카 교관은 박정희에게 진지공격 명령을 내리곤 했는데 명령을 받아 실천하는 자 세에 기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성실함이 느껴졌다. 투지 를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사나이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동남아 시아로 쾌속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남방작전이었다.
 
 1942년 3월 23일 박정희 등 2기생은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했 다. 이날의 졸업식 기사는 우등상을 받는 박정희의 사진과 함께 만주 일보에 실려 있다. 이날 군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졸업식에 부의황 제는 참석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우 치안부대신과 우시 종무관이 참석했다. 만주군관학교 교장 나구모(남운) 중장의 상황보 고에 이어 열병식과 생도대표의 강연이 있었다. 일계 우등생인 오카 미 고야마 두 학생이 강연을 했다.
 
 우 시종무관이 전달한 우등상장을 받은 5명의 명단에 오카미, 고 야마 두 일본생도와 함께 다카키 마사오, 즉 박정희(선계)와 유 장 두 만주계 생도의 이름이 들어 있다. 누가 1등인지 이 기사는 밝히지 않고 있다. 박정희의 동기생들 중 생존해 있는 두 사람 이한림과 김 묵은 '박정희가 2백40명 만계 전체에서 수석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박정희의 이름이 두 만주계 생도보다도 먼저 나오고 수상자 사진도 박정희가 대표로 받는 모습이라 두 동기생의 증언이 사실로 보여진다.
 
 일본계의 수석은 아마도 강연을 한 두 사람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몇달뒤 고향에 들러 누님 박재희에게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는데 나 를 축하해주는 가족이 곁에 없어 눈물이 날뻔 했다'고 말했다. 구미 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뒤 대구사범에서 꼴찌로 떨어졌던 박정희 는 다소 늦은 나이에 다시 1등으로 복귀했다.
 
 수년의 방황 끝에 정열을 쏟아부을 천직을 확실하게 붙들었다는 징표였다. (계속).
 
 (조갑제 출판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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