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야망
박정희가 만주로 온 그 무렵 김일성은 관동군과 만군의 집중적인 공 격을 받아 만주를 떠나고 있었다. 나중에 한반도의 두 주인공이 되어 대결하게되는 두 사람이 바라본 만주는 같지 않았으나 민족이 처한 모순을 자각하도록 한 대지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김일성 빨치 산 부대가 소련으로 후퇴하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간도의 용 정에서 독립군의 신화를 흠모하며 소년기를 보냈던 만주군관학교 1기 생 방원철은 1930년대에 들어서서 독립군의 주력이 공산화되면서 조선 인마을로부터도 민심이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 와 너무 자주, 너무 많이 공출과 헌금을 요구하고 말을 안들으면 동포 유지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어 갔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에 밤손님들이 내려와서는 삼촌을 불러 갹출할 돈을 통보 하고 갑니다. 그러면 마을사람들이 돈을 거두어 3백원, 4백원씩 모아 주곤 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저의 친구 아버지가 너무 잦은 갹출요구에 대해서 잘 협조를 해주지 않자 이분의 머리에 대못을 박아죽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만군장교가 되어 팔로군을 상대로 싸워보니 그들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 신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계열의 빨치산들은 마적단 같이 인민들을 약탈하고 다녔습니다. 이들의 그런 모습 을 더욱 자세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해방된 뒤 김일성 일파와 함께 잠시 인민군 창설에 관계했을때였습니다.'.
이 김일성 계열의 유격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간도특설대는 2개 대대규모의 부대였다. 부대장만 일본인이고 장교들과 병사들은 조선인들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민족반역자들인데, 이 부대에 장교로 근무했던 최남근 강재호는 비밀 항일조직을 만들어 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최남근은 해방 뒤 국군에 들어와서는 좌익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당시 만주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단순히 무슨 색깔 의 군복을 입고 있었느냐로 평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한 것이다.
박정희 등 2기생도들은 1941년 여름 내몽골지역인 흥안서성의 갈근 묘로 2주간의 야영훈련을 나갔다. 주로 농경지로 이루어진 만주의 대지와는 분위기가 또다른 대초원이었다. 지평선에 산이 솟아있는 것이 아스라히 보여 달려가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워낙 평탄하여 조금만 불룩해도 멀리서는 산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서 한 두 바퀴 맴돌면 방향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1기생의 훈련 때는 일본인 생도 두 사람이 부대 숙영지를 떠나 척후로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대초원에서 방향을 잃어버렸던지 늑대에 물려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박정희와 생도들은 용변을 보러 나갈 때는 반드시 두 사람이 짝을 지어 한 사람은 총을들고 늑대떼가 나타나는지를 감시하도록 주의를 받았다.
박정희 일행의 숙소는 라마교 절이었다. 불당에는 소와 개가 여자들과 관계하는 망측한 모습의 조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몽골의 가정에서는 장남이 라마교의 승려가 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이 었다. 라마 수도승은 어디를 가든지 출가하기 직전 처녀들의 정조를 먼저 대접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하지 않고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불상에서 보듯이 소나 개의 생활과 같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수많은 몽 골여자들은 매독에 걸려 있었다.
생도시절의 경험중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조선인 생도들이 오래도록 추억거리로 간직한 것은 철령에서 한 측도연습, 대련에서의 수영, 이 흥안서성에서 한 야영훈련, 그리고 대련 무순 봉천의 중화학공업 시설 시찰이었다. 박정희는 광활한 만주의 대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 고 공업력에 바탕을 둔 일제의 국력과 야망을 확인할수 있었다. 박정 희는 산으로 둘러싸인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답답증을 느꼈었다. 이를 풀기 위하여 나팔도 불어보고 제자들과 같이 병정놀이도 했으며 운동에 전념했었다. 이제 박정희는 광야를 발견한 것이다. 노을에 물 든 붉은 수수밭이 끝없이 뻗어나가고 폭이 1백m나 되는 대로를 중심으 로 대도시가 건설되며 만주철도와 거대한 산업시설이 동맥과 고동으로 다가오는 꿈틀대는 신천지.
박정희가 약 4년간 호흡하였던 이 만주가 그의 머리에 큰 그림을 집어넣어주었을 것이다. 몸집은 작았지만 박정 희는 우리 역사상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스케일감각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가 건설한 포항제철, 현대조선, 고속도로, 신도시, 중화학공업단지, 그린벨트는 좁은 한반도에는 넘치고 오히려 만주 같은 대륙에 어울릴 것 같은 규모였다. 우리의 역사적 전통과 국력에 비추어 예외적이고 과분하게도 보이는 것들이었다. 박정희가 문경이나 한반도 안에서만 살았더라면 그런 대담한 구상은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을 건설하기가 매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신이 보지 않은 것보다도더 크게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일 제가 내세운 5족협화는 말장난이었지만 5족이 뒤엉켜사는 만주는 박정 희를 국제화시켰다.
박정희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동기생은 이한림(1군사령관·건설 부장관 역임)이었다. 둘 다 강직한 면이 비슷했다. 다만 표현방법이 달랐다. 박정희는 과묵으로써, 이한림은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한 언동 으로써 표현했다. 이한림도 소년기에 박정희처럼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전기를 읽고 군인의 길을 꿈꾸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세기의 격 랑')에서 만주체험의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주는) 국제사회와는 완전히 폐쇄되어 있으면서도 그런 폐쇄속의 은근한 풍요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본이 삼켜버리기에는 너무 광활한 땅이었다. 국가의 행정, 법,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공지는 사람들을 활달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야생적이고, 야만적인 면도 있지만 텍사 스적인 열기,짙은 투전판의 분위기, 겨울밤 눈보라와 눈썰매, 독한 고 량주, 일어 노어 중국어 조선어의 혼합, 우글거리는 강도단, 비적 마 적단의 횡행 등 남성적 약동성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런 만주땅의 특징은 소극적인 것,우유부단한 것, 엉거주춤한 중간파 기질을 혐오하 도록 만들었고 강렬한 것, 적극적인 것, 분명한 것을 열망하도록 (나를) 변화시켰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