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생들의 증언
일본육사에 와서 비로소 박정희는 유학생대에 같이 들어간 만주군 관학교 2기 일본인 생도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박정희와 같은 내무반 에 있었던 다케자와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뒤 일본기자들이 많이 찾 아와서 일화를 이야기해 달라고 할 때마다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과 묵하고 성실했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겨우 기억해낸 사건은 어느 날 박정희가 외출갔다가 술을 마시고 얼 굴이 벌겋게 되어 귀대 시간에 맞추려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일이었 다. 동기생 노무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인즉 우리도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육사는 전사 자의 자제들을 우선적으로 합격시켜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합격 정원 의 약 10%는 성적이 좋아도 밀려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억울한 탈락자들이 우리인데 우리 보고서 만주군관학교로 가라고 한 것입니 다. 그런 상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속력이 유달리 강합니다.'.
다른 동기생 오리구치는 1961년 11월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렀을 때 만날 뻔했다. 외무성에서 전화가 왔는데 박정희 의장이 오리구치 와 일본육사시절의 구대장 사카키를 만나고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몇 시간 지나서 다시 연락이 왔는데 일정상 면담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 이었다. 오리구치는 박정희가 왜 사카키 구대장을 만나고 싶어 하는 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사카키는 머리가 비상하면서도 성격은 불같았다. 생도들을 앞에 두고서 간 큰 소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제 틀렸다. 졌다, 졌어. 국민들한테는 이겼다, 이겼다 고 하지만.'.
전시인 그때는 감옥에 갈 발언이었다. 놀란 생도들이 '그러면 우리 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하여간 몸 하나는 잘 건사해야 한다. 끝까지 견디어 살아남도록 하라.'.
오리구치는 박정희가 2·26사건과 같은 일본 청년장교들의 국가개 조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점과 사카키 구대장을 좋아한 것을 연결하 면 박정희의 마음속에서 그때 어떤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는지를 대 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정치인들의 부정 부패, 재벌의 횡포, 빈부의 격차에 대한 가난한 농촌 출신 청년장교들의 쿠 데타 기도에 대한 동감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군대를 독 립투쟁과 국가보위의 수단만이 아닌 국가 개조의 방법으로 보는 생각 을 키워가고 있었다. 만계 생도 오학문은 동기생 박정희에 대해서 이 런 기억을 갖고 있다.
'그는 동기이지만 형 뻘이었습니다. 일본 육사에 유학하고 있을 때 중국생도들과 일본생도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가 중재에 나 서곤 했습니다. 그는 워낙 말이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짐 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 중국생도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을 듣는 그의 표정이나 눈동자에서 우리 편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가 있었습니다.'.
오학문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와서는 장개석 군대로 탈출해버렸다. 그는 중공정권이 설립된 뒤에는 주은래의 참모로 활약 했다. 1970년대 초 신화사 통신 일본주재 기자로 나가서는 일본과 중 국의 국교 교섭에서 부수상 교승지와 다나카 수상 사이의 연락책 역 할을 했다. 그는 한중수교 교섭 때도 막후에서 활약했고 한국에 와서 는 박정희의 생가를 찾았다. 지금도 북경에서 활동 중인 그는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킨 것은 높게 평가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은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했 다. 유학 동기생 이섭준(작고)은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다.
'일본육사 교육은 만주군관학교보다도 더 정신적으로 쥐어짜는 것 이었다.박정희는 여기서도 모범생이었다. 솔직이 말한다면 나는 그때 일본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그런 나의눈에 비친 박정희는 달랐다.그 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 울 것은 군사학 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 다. 내가 '독립이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박정희는 간단하게 답하는 것이었다.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받고 우리 스스 로 사는 것이다.'.
자유시간에는 박정희가 혼자서 운동장을 거닐며 골똘한 생각에 빠 져 있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귀찮게 굴지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된 뒤에 내가 이렇게 말했다. '너, 그때부터 혁명을 꿈꾸었지. 명치유신, 손문혁명, 그리고 터키의 케밀 파샤가 되고싶었지.''.
박정희가 일본육사에 다닐 때 일본은 아직 본격적인 미군의 공습 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남방의 밀림, 중국전선, 그리고 바다와 하늘에서 죽어가고 있었으나 국내는 평온했다. 박정희는 주말 과 방학을 이용하여 일본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대구사범 동기생 김 종길(작고)은 그때 도쿄에서 중앙대학에 다니고 있었다.김종길은 '이 때가 박정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흥겨운시절이 아니었을까'라고 말 했다. 박정희는 일본 조지(상지)대학에 유학와 있던 대구사범 동기생 왕학수(부산일보사장·작고)와 김종길의 하숙집에 자주 놀러갔다. 술, 담배를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였다.
하루는 김종길과 술을 잔뜩 마시 고 귀가가 늦어 외출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이섭준의 누이동생 은 일본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섭준과 한국인 동기생들은 주말에 외출을 나올때는 도시락에 밥을 꽉꽉 눌러담아 갖 다 주곤 했다. 박정희와 단짝인 이한림은 일과만 끝나면 검도장으로 가서 땀을 뺐다. 이한림은 '조국을잃은 조선인 생도로서의 생활은 그 렇게 순탄하지가 않아 우리끼리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했다. 이한 림이 보기에 박정희는 교사를 하고 와서 그런지 세상 물정에 밝았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