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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준 상위
 신현준 상위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은 1944년 여름부터 1946년 5월까지 박 정희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오해와 과장이 많은 박정희의 광복전후 행적에 대한 가장 확실한 목격자가 되었다. 신현준은 경북 금릉에서 출생했다. 나이는 박정희보다 두 살이 많아 이때(1944년) 는 29세였다. 신경 만주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육군훈련처에서 1년 과정의 교육을 받고 만군장교가 되었다. 정일권과 동기였다. 신현준 은 1939년 3월1일에 간도성 명월구에서 창설된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다.
 
 간도특설대는 부대장만 일본인이고 장교들과 사병들은 조선인들 이었다. 이들의 주임무는 장백산 일대에서 활동중이던 공산계열의 항일 빨치산을 토벌하는 일이었다. 1943년 12월 특설대는 만리장성 북쪽인 열하성으로 이동하여 모택동의 팔로군에 대한 작전을 맡게되 었다. 동만주의 항일빨치산이 소련으로 밀려나 새로운 전선을 찾아 간 것이었다. 신현준 상위(대위)는 열하성에서 근무하다가 이웃한 만군8단의 제6연장(중대장)으로 전보되었다.
 
 1944년 7월 28일 오전 11시경 신현준은 흥륭현 삼도하 중대본부에 도착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8단장 부관 박정희 소위였다. 그는 조선말로 이야기했다. 경 상도 억양이었다. 만군에 근무중이던 조선인들은 거의가 함경도 출 신이고 경상도 출신은 드물었다. 신현준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할 때는 조선인 부대였는데도 부대장이 일본인이라 공용어는 일본어였 다. 8단에 오니 중국어가 공용어였다. 그런데 조선어를 듣게 되니 반가웠다.
 
 '제6연장으로 부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세한 것은 오후에 직 접 만나뵙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현준은 두 시간을 걸어서 단본부가 있는 반벽산에 도착하여 중 국인 당제영 상교(대령)에게 신고했다. 이어서 박 소위와 만났다.박 정희는 개구일성이 '형님!'이었다.
 
 '형님! 이번에 부임하신 제6연은 문제가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전임자인 주 상위는 팔로군 토벌임무는 소홀히 하고 무고한 양민에 게 민폐를 끼쳤습니다. 주민들의 원성뿐 아니라 부하들의 신임도 잃 어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6월에 부대 근처 식당에서 시중드는 여인 과 아편을 피우고 놀고있다가 기습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이런 사정 을 미리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듯해서 말씀 드립니다.'.
 
 신현준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빈틈이 없 고 믿음직하게 느껴지는 후배였다. 박정희를 통해서 8단에 만주군관 학교 출신인 이주일 방원철 두 중위가 근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 으니 만리장성 북쪽의 황량한 열하성에서도 안도가 되었다. 신현준 의 6연은 곧 만리장성 남쪽으로 이동했다. 하북성 준화현에 있는 석 문진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지명 그대로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요새에는 6연을 지휘하는 제2영(대)본부와 일 본군 헌병대, 제2기관총연도 주둔하고 있었다. 방어에 유리한 이곳 을 근거지로 삼아 주변에서 활동중인 팔로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다. 9월8일 팔로군약 백명이 남쪽 마을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2영장 유 소교가 신현준의 부대를 비롯하여 대대 규모의 예하부대 전체의 출동을 명령했다.
 
 앞장을 선 신현준의 부대는 팔로군이 숨어 있는 마을 전방 3백m 앞에까지 접근했다가 기습을 당했다. 일장기를 흔들면서 접근하는 일본군 복장의 팔로군 부대가 갑자기 왼쪽 강둑에 나타난 것이다.협 공을 당한 신현준 부대는 경기관총 사격으로 대응했으나 이것마저 고장이 나고 말았다. 중대 지휘반이 척탄통(최대사거리 1백80m)을 총동원하여 수류탄을 쏘면서 반격하고서야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신현준 중대는 전사 3명, 실종자 2명의 피해를 당했다. 신현준은 실 종 2명도 전사했다고 속단하여 전사 5명이라고 보고했다.
 
 다음날 팔로군은 실종자 두 명을 치료하여 들것에 실어서 돌려주었다. 신현준 은 낭패했다. 허위보고를 한 셈이었다. 한때는 책임을 지고 자결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직속상관인 유 소교가 가벼운 문책으 로 수습해주었다.
 
 1944년 여름 연합군은 2차세계대전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고 일 본과 독일을 도처에서 패퇴시키고 있었다. 7월 7일 일본 대본영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사이판이 미군에게 함락되었다고 발표했다. 일 본수비대 3만명뿐 아니라 현지 주민 만명도 운명을 함께 했다.
 
 '섬 곳곳에서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친 돌격의 함성, 아수라같은 우리 용사들의 손에서는 총검이 번쩍이고 죽창, 곤봉까지 휘두르면 서 적진에 돌입하였다. 필살의 정신으로 무장한 오척단신의 일본병 은 나구모 중장과 함께 산호초의 꽃처럼 흩어졌다'.
 
 대본영 발표문은 미군의 과학기술력에 대한 일본군 정신력의 허 망한 도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었다. 미군은 사이판 섬 옆에 붙은 작은 섬 티니안에 비행장을 만들고 B-29폭격기를 띄워 본토공습을 강화했다. 1년 뒤에는 이 섬에서 이륙한 '에놀라 게이'호가 히로시 마 상공에서 원폭을 투하하게 된다. 7월13일 사이판 함락의 책임을 지고 도조내각이 사임했다. 7월20일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동부전선 의 전방지휘소에서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슈타우펜베르그 대 령이 놓고 나간 시한폭탄이 폭발했다.
 
 참모 4명이 즉사했으나 히틀러는 생존했다. 히틀러는 독일 장교단에 대한 일대숙청을 감행한다. 5천명이상의 '불순장교들'이 고통을 연장시키는 피아노선으로 목이 졸리는 방식의 교수형에 처해졌다.
 
 북중국의 산악지대, 인민이란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면서 만군 과 일군을 괴롭히고 있는 모택동의 팔로군과 대면하고 있었던 박정 희 소위, 그리고 조선인 장교들. 이들도 일본의 패망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은 곧 조선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물 음이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할 때였다. 8단의 방원철 중위는 팔로군 으로 달아나는 방법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8월 그는 봉천 육군훈련소에 가서 한달간 폭파교육을 받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봉천의 어느 토요일 오후, 봉천 비행대소속 박승환 항공중위가 찾아 왔다. 육척 장신에 훤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초면인 박승환이 말했 다.
 
 '내일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같이 합시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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