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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동무?
 
 광복된 뒤에 일군 만군출신 장병들로 편성된 북경의 광복군은 대한민 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제3지대 주평진대대로 불리게 되었다. 평진 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단어였다. 이 부대의 대대장에는 신현준 전 만 군상위, 1중대장에는 이주일 전 만군중위, 2중대장에는 박정희 전만군중 위, 3중대장에는 윤영구 전 일군소위, 정훈관에는 정필선 광복군공작원, 군의관에는 엄재완이 임명되었다.
 
 이 부대를 관리하는 것은 장개석 군대 의 소장 출신 최용덕이었다. 최소장과의 연락책임자로 이성가 중국군 중 위가 평진대대에 주재하였다. 원래 상부에서는 이 평진대대를 박정희 중 위에게 맡겨 지휘하려고 했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우등 으로 졸업했다는 사실로 해서 평가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는 상부에 대해서 '나이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신현준 상위가 나보다 위인 데 내가 지휘관이 되면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고 사양했다. 박정희는 그 렇게 해놓고 신현준을 찾아와서 '형님께서 이 부대를 맡아야 하니 부디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마시고 받아주십시오'라고 간청하더란 것이다.
 
 학병출신으로서 이 광복군에 속했던 박기혁(연세대 부총장 역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 집단을 만든 것이다. 배편을 기다리면 서 규율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군사편제로 조직된 것이다. 광복군이란 말에 어울리는 이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했었다. 광복군의 일과 는 훈련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먹는 것이었다.
 
 신현준 박정희 등 간부 들은 최용덕 장관과 함께 북경에 있는 동포들에게서 식량을 얻어 와서 부하들을 먹이느라 애를 먹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서 '구걸해오다시피 하였다'고 했다. 병영으로 쓰고 있던 제지공장 안에는 식당도 없었다.병 사들은 숙소에서 식사를 했고 간부요원들은 취사장 옆에 한 20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을 마련하여 먹었다. 의자가 없어 식탁 주변에 둘러 서서 담소하면서 먹었다. 신현준은 '밥도 먹고 죽고 먹고 굶을 때도 있었다' 고 했다. 이때 박정희는 노래 하나를 작사, 작곡하여 혼자서 콧노래로 부르곤 했다. 신현준은 하도 이 노래를 많이 들어서 50여년이 지난 요사 이도 기억한다.
 
 '조팝 깡다리에 / 소금국만 먹어도 / 광복군 정신만은 / 씩씩하게 살아 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지은 '새마을 노래'와 비슷한 경쾌한 곡이다. 박정희는 평생 울분이나 고통을 나팔불기, 노래부르기, 기타치 기, 단소불기 같은 음악을 통해서 위로받으려고 했다. 음악까지도 그는 아주 실용적으로 이용하였다. 박정희나 신현준은 이 평진대대 안에서 친 일시비에 휘말린 적은 없다고 한다. 광복군 병사들은 계급장은 떼고 일 군, 만군 군복을 개조하여 그대로 입고 다녔다. 진짜 광복군 출신 장준 하(전 사상계사장·작고)가 이때 박정희와 만나 나쁜 사이가 되었다는 풍설은 사실이 아니다. 신현준에 따르면 좌우익 대립이 벌써 이 평진부 대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눈에 안 보이는 38선이 부대원들 사이에 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그 들이 밤을 새워 사상문제로 토론을 벌이는 일도 잦았어요. 박정희 중대 장이 그때 어느 이념에 경도되어 있었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여운형 선생을 줏대 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하던 일입니 다.'.
 
 신현준은 그 사건을 1945년 12월10일 오전10시에 일어났다고 기억하 고 있다. 평진대대의 전병력을 이끌고 야외에 나가서 훈련을 하고 있는 데 갑자기 전방에서 기관총사격소리가 들렸다. 위협사격이었다. 이어서 일단의 중국군(장개석파) 부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훈련을 중지하 고 손을 들고 나오라'고 하더니 아무 설명도 없이 북신구의 병영으로 행 진시켰다.
 
 그리고는 신현준, 박정희, 이주일 등 장교출신 간부진을 몽땅 영창에 집어넣고는 문을 잠그고 사라져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신 현준은 평진부대를 편성할 때부터 중국공산당계열의 조선인 공작원들이 몇사람 묻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집회를 갖고 부대원들에 대한 포섭활동도 거의 공공연히 벌이고 있었다. 이 공산주의자들이 협조를 해 주지 않는 간부진을 혼내주기 위하여 중국군에게 모략을 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신현준은 생각했다. 간부들은 몇 시간 지난 뒤 풀려났으나 이 경험은 박정희에게 오래 기억되었다. 훗날 둘째 딸 박근혜에게 박대 통령은 북경에서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국 땅에서도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한 조선인의 민족성에 대해서 개탄하였다.
 
 박정희는 평진대대에서 처음으로 공산당과 실체적인 접촉을 할 수 있었고 그 첫 경험은 매우 기 분나쁜 기억이되었다. 하루는 박정희가 중대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몇 사 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당의 회의 때문에 먼저 가봐야겠다'고 말하는 것 이었다.
 
 '잔말 말고 훈련이나 받아!'.
 
 박정희는 일부러 더 고된 훈련을 시켰다. 그날 저녁 공산주의자들은 박중대장을 규탄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자고 있는 박정희를 불러 내는 것이었다.
 
 '중대장 동무는 당의 중대한 회의를 무시했으니 책임을 지십시오.'.
 
 이런 선동에 '옳소!'라고 외치며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박정희 는 '옳기는 뭐가 옳아. 돌아가 잠들이나 자!'라는 말을 남기고는 나와버 렸다. 숙소에 돌아온 박정희는 '동무'라는 말을 곱씹으면서 화를 삭이느 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동양적, 무사적 서열의식과 예절에 철저한 박정 희로서는 나이와 계급을 무시하고 맞먹으려드는 공산주의식 인간관계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박대통령은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그 때 보니까 이놈 저놈들이 나서서 군대를 팔아먹으려 하더군'이라고 말하 기도 했다. 우리끼리는 좌우익으로 갈리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장개석 파, 모택동파로 또 한번 찢겨져 서로 평진대대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 우는 조선인들의 심성에 의한 것이 박정희였다. 이 절망은 곧 거대한 문 제의식으로 자라난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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