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25시
만군 중위 박정희가 일본인 장교들과 함께 그 만군에 의해서 무장해 제를 당했을 때 느꼈던 감상은 신현준 상위처럼 착잡했을 것이다. 그 의 회고록 '노해병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만주군 장교가 된 이래로 계속 소중히 아끼고 있던 손때 묻은 군도, 권총, 쌍안경을 고스란히 바치게 되었을 때의 그 심정이란 마치 하늘 을 날던 새가 날개를 잃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국해방 의 기쁨을 안고 희망찬 장래를 기대하면서 전진하기로 결의하였다'.
머나먼 만리장성 산중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해방의 그날을 맞은 박 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는 그러나 잃은 것이 더 많은 자신을 발견하 게 되었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군인의 길을 결단했던 그 는 일본이 항복하는 순간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바로 일본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원폭과 소련의 참전에 의하여 앞당겨진 해방이었기에, 그 해방의 소식조차도 이틀 뒤에야 알았듯이 이 결정적인 순간 에 박정희는 역사의 격류속에 무력한 존재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일제 의 압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반발한 그였지만 그 일본 장교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 군도도, 계급도, 월급(약 1백50원)도 박탈당한 박정희였 다. 이때야 비로소 그는 박상희형이 그토록 말리던 만주행을 후회도 해보았을 것이다. 민족해방의 순간에 서서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서게 된 박정희의 25시. 나라가힘이 없으면 국민이 구차해진다는 이 실감, 해방이 몰고온 모순과 곤혹과 갈등의 이 체험이 박정희를 자주인으로 빚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소련 하바로프스크 북동 약 70㎞ 아무르 강변 부야츠코에 마을 에 있던 88특별저격여단 본부에서 해방을 맞은 김일성 소련군 대위는 박정희 만군 중위와는 처지가 뒤바뀌었다. 쫓는 편에 서 있던 박정희 가 오히려 쫓기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김일성은 북한으로의 금의환향 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한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한뒤 중국인 학교에서 공부하고 19세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던 동북항일연군의 중대장급 지휘관이 되어 빨치 산 투쟁을 하던 김일성은 1941년 무렵 만군과 일군의 공격을 피해 소 련으로 건너갔다.
소련 극동방면군은 이 중국인, 조선인 혼성부대를 88여단이란 첩보 부대로 재편성하였다. 여단장은 중국인 주보중, 김일성 대위는 제1대 대장이었다. 소련군은 조선어까지도 서툴던 이 33세의 대위를 신화속 의 김일성 장군으로 조작하여 평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김일성은 조 국을 떠난지 20여년간 줄곧 중국과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부하로 있음 으로 해서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애환과는 유리되었다. 그는 사실상 중국화된 조선인이었다.
김일성-김정일 집단의 심리적 특징이 된 마적 단적 시각, 즉 북한을 점령지로, 동포들을 노획물로 생각하고 자신들 의 변태적 호화판 생활에는 아무런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않는 특징은 외세에 소속되고 외세에 조종된 만주경험에서 우러난 바 크다. 박정희, 김일성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만주를 경험하고 비슷한 시기에 조국으로 돌아왔다가 15년 뒤에는 서로 대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두 사람이 만주를 어떻게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 그 뒤 한반도의 운명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만군 8단은 흥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게도부대를 무장해제시키 고 장비를 접수했다. 그런뒤 당일 밤으로 흥륭지역에서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당제영 단장이 예하부대에 하달한 훈령은 이런 요지였다고 신현준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내용이 양반스러웠기 때문이다.
'1. 오늘 밤에 한해서 초병들은 사전 허가없이는 일체의 사격행위를 금한다. 2. 우리 8단이 오늘 작별하는 일본군 게도부대와 재회할 때는 적대관계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3.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까지 동맹 관계를 맺고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전우였다는 사실을 저버릴 수는 없 다. 4. 의리를 존중함이 인간의 도리일진대,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도리를 다해야 하느니라'.
8단의 당제영 상교(대령)는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들을 직위해제한 뒤에도 8단에 손님처럼 남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상태에서 8월을 다 보내고 벌써 만리장성으로 남하하는 가을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9월어 느 날, 박정희와 이주일이 신현준을 찾아왔다. 방원철은 봉천을 향해 서 떠난 뒤였다. 박정희가 입을 뗐다.
'이제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택할 진로에 대하여 의견 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중국사정은 형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실 터이니 귀국을 위해서 어떤 노선을 선택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군자는 대로행이라고 하는 말을 명심해야 하네. 봉천을 경유하여 귀 국하는 길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데다가 봉천까지의 철로가 두절되 어있네. 북경을 경유하는 길이 멀기는 하지만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만주국이 망했으니 만군 8단은 고아처럼 되어버렸다. 당제영 단장은 장개석과 모택동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8단 은 부대를 정비한뒤 밀운이라는 도시까지 이동하여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박정희 등 세 사람은 이 기회에 밀운까지만 동행한 다음 헤어지 기로했다. 세 조선인은 당 단장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기차편으로 북경 으로 향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서 9월 21일에 북경에 도착했다고 쓰고 있다. 박정희 일행은 동포가 경영하던 음식점 덕경루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앞날을 걱정했다.
만주-중국 전선에서 해방을 맞은 조선인 장병들 은 북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수십명이 덕경루에서 기숙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최용덕 중국군 소장을 동북판사처장에 임명하여 이들을 광 복군 산하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신현준 이주일 박정희는 이 광복군에 들어가기로 했다. 북경 시내 북신교라는 곳에 제지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 건물과 마당이 광복군의 병영이 되었다. 박정희는 광복된 뒤에 광 복군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쑥스러워했다고 전한다.
(조갑제 출판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