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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그날
 해방의 그날
 
 박승환-김순자부부가 탄 특급 히카리호가 압록강을 지나 안동역에 도착한 것은 8월14일 늦은 밤이었다. 기차는 더 갈 수 없다고 서버렸 다. 역은 등화관제로 캄캄했다. 8월9일 소련군이 참전하여 만주로 물 밀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 피란민들이 안동역에 몰려들어 발디딜 틈도 없었다. 박승환 부부는 일단 기차에서 내렸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초조하기만 했던 것이 박승환이 었다. 그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안동역에 와 있던 조선 건국동맹 군사분맹의 연락책 문용채 만군 헌병상위와 재정담당인 최기영을 만났다.
 
 8월15일 박승환 부부는 다시 봉천을 향해서 출발했다. 봉천 못미쳐서 어떤 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일본천황이 항복방송을 했다는 것 이었다. 역은 텅 비어 있었다. 저녁에 봉천역에 도착했다. 봉천거리 는 조용했다. 일본사람들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중국사람들만 거리를 서성대고 있었다. 둘은 걸어서 서탑지역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박승환은 낙담해마지 않았다. 만군내 조선인 장병들을 끌어모아서 국내로 진격한다는 꿈은 너무 빨리 온 일본의 항복에 의하여 물거품 이 되고 말았다. 박승환은 만주에서 할 일이 별로 없다는 판단을 했 다. 서울로 돌아가서 여운형을 돕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운형 은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을 선포한 뒤 일본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겠 다고 서두르고 있었다. 박승환은 이제는 건국과 건군으로 행동방향을 돌려야겠다고 판단한다.
 
 하루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미 철로 는 끊겨버렸다. 박승환은 조선인 장교들을 이해해주던 만군장교 간노 히로시를 찾았다. 비행기를 하나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8월17일 낮에 박승환, 최창윤, 양국진 등 조선인 장교 일곱 명을 태운 군용기가 봉 천 비행장을 이륙하여 약 두 시간의 비행 끝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포진하고 있던 만군8단의 네 조선인 장 교들.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반벽산의 단본부에 있던 단장부관 박정희 중위였다. 그는 7월1일자로 중위로 진급했었다. 8단은 만리장성 북쪽에 흩어져 있는 전병력(약4천명)을 흥륭에 집결 시켰다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몽골의 다륜으로 북진하라는 작전임 무를 부여받았다. 박정희는 이런 명령을 신현준의 제6연을 비롯한 예 하 부대에 전달했다.
 
 그때 방원철이 속해 있던 중화기중대는 만리장 성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일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통신 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만군은 대대급 부대만이 발전식 무전기를 갖고 다녔다. 한 30분간 발전기를 돌리고 통신기를 틀어야 송수신이 되는 퇴물이었다. 방원철이 선임장교로 있던 중화기중대가 만리장성 남쪽 에서 작전을 마치고 반벽산에서 20리쯤 떨어진 고산자의 본부로 돌아 온 것은 8월13일 오후. 목욕을 하려는데 박정희 중위가 전화를 걸어 왔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유지를 위해서 조선어를 쓰 겠습니다. 지난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전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 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흥륭에 집결했다가 다륜으로 진격하게 되 었습니다. 내일 새벽 5시까지 반벽산에 도착해주십시오. 반벽산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흥륭으로 향합니다.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꾸려주십 시오.'.
 
 이 순간 방원철도 아차 했다. 그 한 달 전 평천에 주둔하던 헌병 상위 문용채가 엽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건국동맹 군사분맹'의 연락 책인 문용채는 이 엽서에서 '나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봉천으로 간다.
 
 방 중위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휴가를 얻어 서 우선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했다. 방 중위는 이 편지를, '이제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으니 휴가를 내어 후방으로 빠졌다가 거사하자'는 취지로 이해했다. 그래서 상부에 휴가를 신청 했더니 일군의 합동작전이 끝난 뒤 한 달간의 휴가를 주겠다는 약속 을 받았던 것이다. 방원철의 중화기중대 약2백50명은 당나귀 50마리 에다가 짐을 싣고서 14일 새벽에 반벽산으로 출발했다.
 
 폭우가 쏟아 지기 시작했다. 반벽산에 집결한 8단 병력은 행군대열로 재편성하여 바로 흥륭으로 출발했다. 반벽산 흥륭은 약60㎞의 거리였지만 강원 도 산악지대처럼 험했다. 차는 다닐 수 없었다. 당나귀와 보병으로 구성된 긴 행렬이 연일 계속되는 폭우를 뚫고 걸어갔다. 절벽과 계곡 을 따라 난 길을 걷자니 하루 50리가 고작이었다. 방원철의 중대에서 는 졸면서 걷던 병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기도 했고 급류를 건너 다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신현준의 중대도 식량과 탄약을 실은 당나귀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를 당하는가 하면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야간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우군부대가 오인사격을 해온 것이었다. 8월15일, 16일도 행군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사실도 모르고 그들은 걷고 있었다. 폭우 를 맞으면서 잠을 자고 깨어나면 또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전기를 한참 돌려야 작동하는 무전기를 켤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8월17일 방원철의 부대가 흥륭에 거의 당도하였을 때 무전기를 작동시켰다.아 무 방송도 잡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중국어 방송이 나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장개석의 육성연설이 방송되고 있었다. 방원 철은 그 연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14년에 걸친 중국 침략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하여 항복하 였습니다. 동북지방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보다도 더 심한 압제를 받았습니다. 조선사람들 중에는 일본인에게 빌붙어 나쁜 짓을 한 사 람도 있습니다만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하는 바입니다. 동북변사처를 조직하여 왕장군(중국군 소속 조선인 김홍일장군을 지칭)을 파견하기 로 하였으니 자중자애해주시기 바랍니다.'.
 
 뒤따라오던 신현준은 흥륭에 당도하여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현 준,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8단장은 매우 원만하게 이 사태 를 관리했다고 한다.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 네 명은 일본인 장교 13 명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했다. 당제영 단장은 일본인 장교들을 흥륭 소재 일본군게도 부대에 인계했다. 다른 만군 부대에서는 일본인 장 교들이 중국인 사병들에 의해서 피살되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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