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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귀향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구미역 근처에서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 는 막내 며느리 김호남, 손녀 박재옥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바로 옆집 에 사는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가 마련해준 집이었다. 박정희의 작 은 누님 박재희도 남편 한정봉과 함께 옆집에서 살고 있었다. 상모리 에는 박정희의 큰 형 동희 무희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박정희가 북 경에서 붙여온 편지로 무사함을 알고 있었다.
 
 박정희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그를 귀여워해주어 정이 들었던 박재희는 기차소리만 나면 구 미역으로 나가보곤 했다. 1946년 5월 박재희는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삽짝문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박정희가 씨익 웃으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밀집모자, 반바지, 반소매 옷, 운동화 차림이었다. 손에는 막대기를 들었는데 장교의 지휘봉 같 았다. 그것을 휘휘 두르고 있었다. '걸뱅이' 꼴이었다. 불과 2년 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오는 길에 별 달린 군모, 긴 칼, 망토 입고 구 미역에 내렸을 때 모여든 주민들로부터 온통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박 정희는 지휘봉 하나만 달랑 들고 해방된 조국에 나타난 것이다.
 
 '오빠들은 동생에게, 그냥 교사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습니 다. 동생은 제집에는 가지 않고 우리 집에서 먹고 자는 일이 많았어 요.'.
 
 2년 전에 작고한 박재희는 귀향한 직후의 박정희에 대한 가장 확 실한 목격자이다.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동생은 우리 집을 근거지로 삼아 별 하는 일 없이 소일했습니다. 마을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면 동생이 읽던 신 문으로 얼굴을 덮고 자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꼴을 보니 눈물이 나더군요. 누구보다도 동생을 아껴주던 상희 오빠 는 바로 옆집인데도 식사하자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해방 직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분국을 이끌었던 박상희는 이즘 구미면의 좌익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한번은 박정희 가 상희 형과 토론하는 것이 조카 박재석에게 목격되었다. 박상희는 여운형 노선을 옹호하면서 이승만을 비난하는데 박정희는 좀처럼 그 주장에 수긍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 박사도 해외 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해오신 훌륭한 분이십니다'라고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시절에 박정희는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이 런 증언을 남겼다.
 
 '상희 형에게 북경의 광복군에 들어갔다가 귀국이 늦어졌다고 했 더니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야. 그때서야 비로소 아 형님이 좌익으로 돌았구나 하는 판단이 서게 되더군.'.
 
 박정희는 광복군에서 공산당 프락치들로부터 시달린 경험이 생생 해 상희형의 활동에 선뜻 동조할 마음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박상희 는 친척들에게 '정희한테 돈 주면 안돼'라고 말하는 등 방관자적 태 도를 취하는 동생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낙선(전 상공부장관)이 최고회의 의장 공보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작성한 비망록에는 이 즈음의 박정희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형들의 집을 전전하는 고독한 신세였다. 간혹 죽마고우를 만나면 주석이 하나의 낙이었다. 친우들로부터 과거지사에 대해서 질문을 받 을 때는 '그런 것은 알아서 무얼 하나. 술이나 마시게' 할 정도로 극 히 말이 적었고 웃는 것을 본 사람도 없다. 청년들이 좌우로 갈려서 정쟁을 일삼아도 그는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리지도 가담하지 도 않았다. 어떤 친우가, '이제 군생활을 잊고 정당생활이 어떻겠느 냐'고 물었더니 '귀찮다'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고향에서 허송세월하 던 중 서울에 다녀왔는데 '세상은 썩었어. 더러워'하면서 불평만 했 다.'.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에 다닐 때 동급생이던 이준상의 사랑방에 자주 놀러갔다. 마음 편한 친구와 어울려 그는 집안사람들의 냉대와 마을사람들의 조소를 피하고 있었다. 이준상은 박정희가 오면 열살아 래인 송재욱(현재 72세·향토사학자)을 부르곤 했다. 구미국민학교 음악교사이던 송재욱은 기타와 만돌린, 유행가 악보를 들고 간다. 박 정희는 막걸리 잔을 옆에 두고 벽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댄 채 줄담배 를 피우고 있었다. 이준상, 송재욱 두 사람이 연주하는 유행가를 듣 고 있다가 박정희는 '나도 좀 해보자'라고 한다. 박정희는 기타를 전 주 간주 후주까지 다 연주하는데 나무랄 데가 없이 깔끔하였다. 그는 '황성옛터' '귀국선' 같은 곡을 좋아했다.
 
 박정희는 경부선을 타고 대구로 내려가 대구사범 동기생들을 만나 곤 했다. 권상하(청와대 정보비서관 역임)는 그때 대구일보 사회부 기자였다. 그를 찾아온 박정희는 '위로의 말부터 꺼내게 만드는 옷차 림이었다'고 한다. 대구 번화가에 개업한 백조란 다방에서 만나곤 했 던 박정희에게 권상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차와 우동이나 사주는 정 도였다.
 
 '박정희가 '이제 올라가야지'라고 했을 때 나는 '차비는 있나'라 고 묻습니다만 벌써 제 호주머니에 손이 들어가 돈을 꺼내고 있지요. 차비가 없을 게 뻔한데 괜히 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큰 딸 박재옥은 그때 아홉 살이었다. 구미국민학교 1학년생. 오랜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식사도 하고 말도 하고 하는 것이 좋았 다. 아버지를 이렇게 오래 곁에 두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무뚝뚝한 박정희는 아내와 정담을 나눌 사람이 아니었다. 그 럴 시대도 아니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박상희, 박재희 집안 일을 돕 는다고 바빴다. 박재옥은 아버지가 '담배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때가 좋았다. 잔돈은 자신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앉으나 누 우나 늘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방을 걸레질하면서 딸 에게 한숨 섞인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야, 너희 아버지는 또 서울로 가신단다. 형님하고 뜻이 안맞는다 는 건지, 원.' ( 계속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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