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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의 절망
 조국에의 절망
 
 북경의 광복군 제3지대 평진대대 간부숙소에서 박정희와 여덟 달 동안 같이 생활했던 군의관 엄재완은 그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워낙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뉴욕 근방롱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엄씨는 자신의 결혼식 때 들러리 를 선 박정희가양 복을 빌려입으면서 '난생 처음 이런 일을 한다'고 어색해했던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박정희' 하면 바로 뒤따라오 는 '과묵함'이란 단어는 '생각이 많음'이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말 이 적었던 만큼, 아니 말이 적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생각을 많이,깊 게 하게 되었다. 고민, 계산, 구상, 상상, 계획, 반성 등등의 과정 을 담은 이 생각에 시간을 많이 보낸 이가 박정희였고 그의 힘은 바 로 이 생각의 축적량이 엄청나다는 데서 나왔던 것이다.
 
 엄재완은 경희의대의 전신인 경성동양의전을 졸업한 뒤 일제의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부모들이 살고 있던 북경으로 피신했다가 해 방을 맞았다. 해방직후 동포들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젊은이들 을 상대로 광복군에 들어가라고 권유하고다닐 때 이 광복군에 지원했다. 처음에는 동포들의 성원이 대단하였다. 매일 통돼지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지원이 줄어들고 동포들도 귀국하기 시작하자 하루 세 끼의 해결이 골칫거리였다. 광복군은 이렇게 되니 훈련은 거의 할 수 없게 되고 오로지 귀국선이 올 때까지 젊은이들 을 먹이고 재워주는 곳이 되었다.
 
 원래 평진대대를 만들 때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10만명 규모의 광 복군을 편성하여 단체로 입국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군이 임 시정부 요인들까지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도록 조건을 단 마당에 그런 구상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이었다. 당시 북경을 비롯한 중국에 는 수십만 명의 한국사람들이 모여서 귀국의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 다. 미군정당국은 수송선단을 배치하여 열심히 실어날랐다. 평진대 대 사람들은 1946년4월29일 북경을 떠났다. 천진의 당고항에 도착하 여 1주일간을 대기하다가 5월6일에 미 해군 수송선에 올랐다.
 
 5월8 일 부산항에 도착한 수송선에서 귀국자들은 이틀을 더 기다려야 했 다. 그때 한국에서는 콜레라가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박정희도 다 른 하선자들과 함께 미군 검역당무자들로부터 디디티(DDT)가루를 뒤 집어쓰는 전신소독을 받았다. 이 가루를 밀가루로 오인하여 '왜 그 아까운 것을 버리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 군정당국에 서는 약간의 귀향비도 나누어 주었다. 5월10일에 부산항에 상륙한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등 다른 귀국자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장충단 근처에 있던 귀국자임시수용소에서 며칠 머물다가 구미로 향 했다.
 
 당시 박정희의 눈에 비친 조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제라는 구질서는 무너졌지만 미군정이란 신질서는 한시적이란 숙명으로 해 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한국사람들은 권력의 무중력상태에서 가난과 무질서, 그리고 사상대결이란 일대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1932년 대구사범에 입학한 이래 박정희는 단련과 훈련, 질서와 절도 의 생활을 14년 동안이나 했다. 정리 정돈, 청결과 정직을 생활화한 그였기에 실망도 남달랐을 것이다. 대체로 일본, 만주로부터 귀환한 동포들은 조국의 혼란상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박정희의 만주군관 동기생 이한림은 이런 요지의 느낌을 기록했다(회고록 '세기의 격랑').
 
 '나는 서울의 조잡성과 무질서에 놀랐다. 이것이 내가 그리던 조 국의 참모습이었는가. 이렇게 낡은 집들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니.탁 트이고 넉넉한 만주 땅에서 청년시절을 보낸 나에게 있어서 서울의 모습은 초라하고 왜소하기만 하였다. 길거리 벽마다 다닥다닥 붙은 선전물, 2층 이상의 집집마다 너덜너덜하게 걸쳐 있는 프래카드. 방 향 감각을 잃은 것 같은 서울시민들의 우울한 표정. 서울역은 더딘 열차를 한없이 기다리는 손님들로 법석이었고 시내 전차는 다니다말 다 하는 식이었다.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과 '찬성'을 외 치는 시민들이 거리를 누비고 그들은 무질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 아가고 있었다. 만주 땅 신경의 게시판에서 보았던 이승만박사의 환 국 소식을 접하고 느꼈던 조국에의 그리움은 결국 조국의 현실에 부 닥치게 되자 꿈이었구나 하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기자는 1945년10월에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출생했다. 우리 가족 은 박정희보다 한 달 먼저인 1946년4월에 부산항을 통해서 귀국하여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박정희보다 다섯 살 위인 아버지는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야 이거 잘못 왔구나'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 다고 생전에 회고한 적이 있다. 귀국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소 년들이 서로 남의 물건은 엉터리고 내것만 좋다고 외쳐대는 것을 보 고 충격을 받았다. 경부선 기차를 탔더니 의자에 붙은 모든 것들이 뜯겨없어지고 승객들은 서로 내 자리라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전후도 혼란과 무질서였지만 '시민윤리가 이토록 땅에 떨어 진 적은 없었는데…'하는 것이 아버지의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증언 에 따르면 사이타마현의 우리 마을 촌장은 딸을 미군 점령부대장의 애첩으로 보내더라고 한다. 이 미군 장교는 흑인이었다. 이 촌장의 딸은 흑인장교를 구워삶아 미군 장병들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행 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을의 어느 누구도 그 딸을 욕하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더란 것이다. 아버지는 '귀국한 뒤 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너희들을 생각해서 눌러앉기로 했단다'라고 말하곤 했다. 아마 박정희의 충격도 이한림이나 아버지 의 그것과 대차가 없었을 것이다.
 
 '(신현준)형님, 아무리 항산이면 항심이라 카지만 조선사람은 풀 어놓으면 모두가 지 잘낫다는 것뿐이고, 지 멋대로가 아닙니까. 와, 그 왜놈들이 잘 카던, 조센진도 멘타이...(조선인과 명태는…)카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왜놈들을 패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꼬라지를 보니 그런 히니쿠(비야냥)를 들어도 싸다 싶습니다. 누군가 매를 들고 두들겨주기 전에는 이런 무질서는 백년하청일낍니다. 형님, 지 말이 틀립니까'(정영진이 지 은 '실록소설·청년 박정희 2권'에서 인용).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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