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폭풍(5)
해방과 함께 표면에 나온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에게 '증오와 위 선의 과학'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계급 해방'이란 명분 아래 부모, 사제, 상하간의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더 큰 휴머니즘이요역사의 발전이라고 가르쳤다. 인륜을 파괴하는 행동에 죄책감이 아니라 사명감 을 부여한 이 '악마의 논리'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동족상잔과 내분의씨 앗이 되었다. 계급적 이익을 민족애와 국익보다도 더 중시하는 공산주 의자는 본질적으로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전략에 민족과 국가를 파는 사 대주의자였다(그런 점에서는 이들이 증오했던 친일파와 같다).
김계철(67세)은 대구사범 학생으로 10월폭동에 가담했다가 월북하여 공산주의의 실상에 절망한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1994년에 44년만에 귀향. 그는 대구사범 선배 박정희 형제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건의 내막을 소년의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다. 김계철은 해방이 되자 좌익학 생들이 대구사범 김용하 교장을 연단으로 끌고 나와 여러 학생들이 보 는 데서 '민족반역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은 특별하게 친일행동을 한 적도 없는 김 교장의 머리를, 신발을 벗어 때리는데 교 사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김계철에게 쪽지를 봉투에 넣어주 면서 대구의대 학생대표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김군은 봉투를 들고 가 다가 쪽지를 펴보았다. '시체 네 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쪽지를 전달받은 학생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 하고 물었다. 그 학생이 김군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담겨 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 있는 송장들을 보여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 고 하는 것이었다.
10월 1일대구에서 좌익 노동자들이 '쌀배급' '일급 제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시위 를 벌였다. 경찰의 자위적인 발사로시위대원 한 사람이 맞았다(이 사람 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아 과연 사망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다음날 대구의대 학생들이 흰 가운을 입고 들것에 들고나와 시위를 선동하는 데 써먹은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김계철 소년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음이 확실하다. 이날 대구경찰서는 폭도화한 시위군중에 항복하고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무기를 탈취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준 좌익극렬세력은 동족을 상대로 한 살육의 제전을 벌인다. 표적은 경찰과 지주들이었지만 무고한 사람 들이 더 많이 죽었다. 살육의 방법도 그 뒤의 동족상잔의 과정에서 되 풀이되는 전형적인 공산당식이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로는 그 가족까지 때려죽이고 찔러죽이고 찢어죽이고 불태워죽였다. 공산당이 가학취미적 학살을 즐긴 것은 이른바 '반동학살'을 '위대한 혁명적행위' 로 합리화했기 때문에 양심을 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선동 한 폭동에는 깡패와 양아치, 그리고 부화뇌동한 민중이 대거 참여하여 절제되지 않는 살육에 도를 더했다. 좌익 의대생과 의사들이 인명살상 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립의원에 실려온 부상 경찰관들은 화단 주변에서 폭도들에 의 하여 맞아죽었다. '그중 몇 사람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죽음 직전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청년들은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확인 타살을 했다'(당시 대구의대 3년생 김만재 증언). '어떤 부상한 경찰관 이 살려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내 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 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나 왔다'(이원만 '나의 정경50년'). 이날(10월 2일) 오후 미군은 대구일원 에 계엄령을 선포하고사태를 장악했다. 좌익폭도들은 그러나 대구 근교 로 진출하여 살상의 피바람은 경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박정희 일 가가 한때 살았던 칠곡군 약목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약목지서를 먼저 습격하여 주재중인 세 경관을 기둥에 결 박한다음 낫과 도끼로 전신을 참살했다. 또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여 서 장사택을 파괴하고 서장, 수사과장 외 4명의 경찰관을 도끼로 참살했다. 특히 장 서장은 두부로부터 밑으로 절반을 째 죽였다(대구시보 1946년 10월13일자)'.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가 주동한 구미폭동은 위에 묘사된 살육극과 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구시보 정치용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 면 '선산군 민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조직) 사무국장이자 선산인민 위원회내정부장이던 박상희는 2천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적기가를 부 르면서 구미경찰서를 습격하여 백철상 서장에게 전 기능을 인민위원회 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김성동(64·전 통일원 비상계획국 장)소년은 경찰서 옆에 살고 있었는데 이때 구경삼아 거리로 나왔다.폭 도들이 곡괭이와 쇠스랑을 둘러메고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종술 경사가 경찰서 뒤편 철조망을 넘다가 괭이에 얻어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더니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일제 때 기마부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민전간부 김정수가 무기고를 열고 총과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좌 익폭도가 처음으로 쳐들어간 곳은 대성당 약방 주인 송대헌의 집이었다. 폭도들은 송씨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더니 기름통을 가져와 2층 건물 현관에 석유를 붓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려는 찰라 '야, 이놈들아!'하 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송대헌의 아들 송재욱의 목격담). 박상희였 다.
'누가 이 집에 불 지르라켓노? 어느 놈이 시켰노? 앞으로 투쟁과업을 계속하다가 보면 부상자들도 나올낀데 약방을 태우면 느그들은 어데 가 서 약 바를 거야?'.
청년들은 호랑이 같은 박상희의 호통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 벅였다.
'약방이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송재욱 선생은 학교에서 노래 가 르치지느 그들한테 욕 가르치나. 이 할아부지는 독립운동했는데 느그들 한테뭐 잘못한 거 있노. 그런데 왜 불질러? 집에 안 가나'.
박상희는 청년들이 흩어지자 멍하니 서 있는 송재욱을 향해서 야단 을 쳤다.
'조사부 차장은 여기서 뭘 하노? 신분도 안 밝히고.'.
송재욱은 해방 직후 박상희의 지도하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의 조사부차장이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