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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군대
 이상한 군대
 
 영친왕 이은의 열변은 이형근대위에 대한 당부로 끝났다.
 
 '그러니 이대위는 급히 귀국해서 독립을 수호할 국군 창설에 힘써주 길 바라오. 처음부터 무에서 유를 창조할 각오가 단단해야 할 것이오.'.
 
 이형근은 이은의 이 고백이 '일생 잊지 못할 교훈'으로 남았다고 말 했다.
 
 일본 육군포병대위이던 이형근은 일본에 있던 한국인 장병1천2백명 을 데리고 1945년10월2일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이형근은 일본육사 선 배인 이응준(일본군 대좌 출신)의 권유로 국방경비대에 들어가게 되었 다. 1946년1월15일 이형근이 미군정청에 가서 다른 임관자들과 같이 사 령장을 받아보았더니 계급은 정위(대위), 군번은 1번이었다. 일본육사 의 29년선배되는 사람의 군번이 4번, 7년 선배는 2번이었다. 이형근이 '이는 동양적인 예절을 무시하는 것이다'고 미군담당자에 항의했더니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귀관은 우리가 도대체 할 일이 없어서 한국에다가 일본군을 재건하 기를 기대하는가. 이제는 일본 시대의 서열은 하등 의미가 없어요. 오 직 우리 명령에만 복종하시오.'.
 
 자주국방을 못해서 망한 우리 나라에서 근대식 군대를 만드는 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고통과 시행착오, 그리고 혼란이 따랐다. 1945년 11월13일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군정법령28호를 공포하여 국방 사령부를 설치한 것은 미군이 한국군의 산파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미 군은 그해 12월5일 서대문의 감리교 신학교내에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 였다. 일군, 만군의 간부경력자들을 모집하여 영어를 가르치고 장교로 임관시켰다.
 
 약2백명에 이르는 이 군영출신자들이 건군을 주도하게된다. 북한인민군의 창설도 평양 노어학교창설에서 출발하였다. 점령군의 언 어를 배우는 것에서 남북한 군대의 창설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군 대제도도 미군과 소련군식을 추종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946년1월 15일 미군정당국은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초대사령관에는 마 샬 육군중령이 임명되었다.
 
 미군은 같은 날 태릉에 1개 대대병력으로 제1연대를 발족시켰다. 초 대연대장에는 일군병기장교 출신인 채병덕이었다. 1월29일에는 5연대가 부산에서, 2월10일엔 7연대가 충북에서, 15일에는 4연대가 전남에서, 18일엔 6연대가 대구에서, 26일엔 3연대가 전북 이리에서 창설되었다. 2월28일에는 2연대가 대전에서, 4월1일엔 8연대가 춘천에서 창설되었다. 4월8일에는 국방사령부가 국방부로 개칭되었다. 4월15일에는 해군의 모 체로서 인천에 해안경비대 기지를 설치하게 되었다. 1월21일 미군 정청 은 모든 사설군사단체에 대한 해산명령을 내렸다. 5월1일에는 국방경비 사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초기 장교입대자들의 성분에는 뚜렷한 특색이 있었다. 광복군, 중국 군 출신들도 있었지만 주류는 만군, 일군출신이었다. 해방직후 김일성 집단의 압제를 피해서 내려온 이북 출신들도 군에 많이 들어왔다. 군대 의 헤게모니를 반공의식이 강한 북한출신자들이 잡게 된 것이다.
 
 한편 창군의 실무를 맡은 미군측은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을 적용 하여 입대자의 전력을 문제삼지 않았다.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군 입대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남한에서는 월남한 북한청년들이 조 직한 서북청년회가 반공투쟁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살 만 한 일을 더러 하고 있었다. 이들에 반감을 품은 젊은이들과 친일경찰출 신의 발호를 증오하는 청년들이 많이 입대하였다.
 
 미군정은 치안유지의 주력을 경찰로 두고 군을 경찰의 보조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 어 군내의 반경찰 감정도 대단하였다. 국방경비대는 우익과 좌익이 뒤 섞인 조직이 되었다. 남북한의, 그리고 남한내의 사상대결이 심각해질 수록 군내의 이런 모순은 언젠가는 해결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제가 된 다.
 
 창군과정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 박정희가 다시 생도로 들어간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들의 구성이었다. 2기출신인 박중근(76 ·육군대령 출신)은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를 비롯한 엘리트 그룹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독립'이라는 뚜 렷한 목표의식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이런 생도들이 3분의 1, 나머지 3분의 1은 보통사람들, 그 나머지 3분의 1은 심하게 말해서 무식한 사 람들이었습니다.'.
 
 일본군 기병대의 말을 관리하던 마부출신도 있었고 글도 제대로 못 쓰는하사관들이 부대장의 추천으로 입교한 경우도 많았다. 미군이 만든 학교였지만 교육은 일본군식이었다. 일군이 두고 간 군복을 꺼내 고쳐 입었고 일본군대가 쓰던 99식, 38식 소총과 수냉식경기관총으로 훈련했 다. 박정희로서는 친구나 후배가 교관이었으니 한심했을 것이다. 생도 들은 교관들이나 중대장에게 공식석상에서는 말을 높였지만 사석에서는 나이를 따져 반말을 하고 있었다.
 
 가장 많은 시간이 제식훈련에 투입되 었다. 일본군식의 '우향 앞으로 가'와 미군식이 달랐으니 미군식으로 바꾸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일정하에서 엘리트 장교였던 박정희로서는 이런 미국화교육에 적지 않은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박정희 는 미국과 유감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는 생애를 보냈다. 나중에 그가 갖게 되는 미국에 대한 거부감의 최초의 씨앗은 이 육사교정에서 뿌려 졌다. 박정희가 존경하던 원용덕교장은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미 고 문관과의 불화로 8연대장으로 전출되었다. 나름대로의 엘리트 의식을 가졌던 일군, 만군출신 장교들일수록 미고문관들과 충돌이 잦았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만군출신 생도들이 혼란스런 창군과정에 잘 적 응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원칙주의자들인 일군장교출신 생도들은 상황 이 정상일 때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비정상일 때는 어리둥절해지는 반면 만주라는 혼란상황에 익숙했던 만군출신들은 오히려 요령과 임기응변을 잘 부리고 미군들과도 잘 사귀었다. 이것은 만군출신이 초창기 한국군 의 헤게모니를 잡게 되는 한 원인이 된다. 박정희는 일군출신의 원칙주 의와 만군출신의 유연성을 다 갖고 있었다. 박정희가 입교한 지 열흘 뒤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 한 사건이 대구를 중심으로 폭풍처럼 일어난 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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