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근
박정희 소위가 춘천에 있던 8연대 본부에서 작전참모대리로 근무할 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김점곤(육군소장, 경희대 교수)중위였다. 두 사람은 춘천시내에 있던 일본식 목욕탕에 가끔 들러 신상문제를 이야 기하곤 했다. 박정희는 본처와 헤어졌다면서 재혼할 뜻을 비치기도 했다. 원용덕연대장은 박정희를 결혼시키려고 애썼다. 원용덕의 아버지 는 목사였는데 원목사가 철도청 직원의 딸을 소개했다.
원용덕, 김점 곤, 박정희가 함께 용산에 있던 철도청 관사에 가서 그 딸과 선을 보 았는데 박정희가 퇴짜를 놓았다. 김점곤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자를 고 르는 심미안이 꽤 높았다고 한다. 원목사는 좋은 처녀를 놓친다고 못 내 아쉬워했다. 하도 그러니까 원용덕은 '그렇게 아까우시면 아버님께 서 장가드시지요'라고 우스개를 했다. 원용덕은 나중에 박정희의 큰 딸 재옥과 한병기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게 된다.
박정희 소위가 작전참모대리로서 한 일 가운데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조선경비대 창설 이후 처음으로 실시한 야외기동훈련이다. 7월에 박정희는 1주일간 연대 장교단에 대한 특별교육을 실시했다. 교관이 되어 혼자서 교안을 만들고 소대전투훈련, 분대전투훈련, 진중근무,수 류탄 투척훈련을 시켰다. 그때는 장교들의 다수가 일제시대의 학병, 하사관 출신들이어서 사병들에 대한 교육을 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만 군8단에서 작전장교 역할을 하여 실전경험이 있는 박정희의 능력을 원 용덕이 높게 샀던 것이다. 장교단 교육을 마친 8연대는 7월22일부터 3일간강릉-후포사이의 동해안에서 야외기동훈련을 펼치면서 모의 전투 를 벌였다. 이 연습의 계획서와 평가보고서는 박정희 소위가 작성했는 데 원본이 남아 있다. 세밀한 지도 그림과 치밀한 계획서 내용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하게 만든다. 박정희는 '교육실시후 소감'란에서 장교들의 저질을 개탄하고 있다.
(군대지휘관으로서 치열한 책임감이 결핍함. 매사에 진취 적극성이 부족함. 울진방면 연습에 있어서 병사는 한 명도 낙오자가 없었음에도 장교가 먼저 낙오하였다는 것은 병사에 대한 장교의 권위의 실추 이에 더함이 없으리라. 야비한 언어, 저급한 취미를 가지고 장교로서의 위 신을 훼손한 점이 많은 것을 볼 때 장교단 교육의 부진을 통감하지 않 을 수 없음. 건군의 초석이 되겠다는 것을 군인으로서 신앙시할만큼 투철한 신념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는 여기에 귀일할 것임).
박정희 소위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승진한 뒤 1947년 9월27일에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옮겼다. 박정희는 10월23일에 입교한 5기생(4백20명) 때부터 가르치게 된다. 사관학교의 틀이 잡히 기 시작한 것이 5기생부터였다. 교육기간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었다. 5기는 민간인만을 대상으로 모집한 첫번째 기였다. 5기생의 약3분의2 가 월남한 북한출신 청년들이었다.
나중 5·16쿠데타 때 박정희에게 핵심적으로 협조한 지휘관들 중에는 박정희 중대장의 인격에 감복했던 5기제자들이 많았다. 혁명군 지휘소로 쓰였던 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 재춘, 서울에 진입한 5사단의 채명신사단장, 해병여단과 함께 한강을 건넌공수단장 박치옥, 육군본부를 장악했던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이 5기생이었다. 사관학교는 박정희에게 미래에 소용이 될 인맥을 마 련하여주는 한편 그를 좌익조직에 묶어놓는 인맥도 제공하였다. 박정 희가 5기생을 맡았을 때 사관학교 교장은 김백일중령, 생도대장은 최 창언소령, 행정처장은 장도영중령이었다.
박정희는 1중대장, 그 아래 2구대장은 황택림중위, 2중대장은 강창 선대위, 그 아래 2구대장은 김학림대위였다. 박정희를포함한 이 네 장 교는모두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었다. 이들은 1년 뒤 숙군수사 때 체포 되고박정희만 살아난다. 남로당은 군대 내부에 공산당 세포를 심는 가 장 효율적인 방법은 생도들을 가르치는 사관학교 장교들을 포섭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종필은 1986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강 창선이 군대내의 좌익 두목이었는데 박 대통령을포섭하려고 자꾸 끌고 다니면서 술을 같이 마시고 해서 술 좋아하는 분이술 얻어먹다가 의심 을 받게 된 걸로 압니다'라고 했으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강 창선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으로서 그때도 유일하게 창씨개 명을 거부하고 버틴 사람이었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이 강창선은 두목이 아니었고 군부내의 두목급이라면 단연 최 남근이었다. 그는 신경(지금의 장춘)에 있던 만주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육군훈련처 출신으로서 해방때는 간도특설대의 신병교육대 부대장 이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박승환이 조직한 여운형계열의 만군내 비 밀항일조직에 들어 있었다. 박정희의 좌익인맥은 만군시절로 그 뿌리 가 올라간다.
몸과 마음의 통이 다 큰 최남근은 해방된 뒤 일찍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덕분에 박정희가 육사중대장일 때는 대구에 주둔한 6연대장이 었다. 박정희는 이때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 최남근과 자주 접촉하 고 있었고 많은 목격자를 남겼다. 박정희는 강창선 정도가 아니라 처 음부터 남로당 대군공작부서의 지휘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사관학교로 부임해온 뒤 잠시 서소문의 한 여관에 묵고 있었다.
이때 경비사관학교 동기 한웅진중위가 6연대 헌병대장으로 있으면서 법무관 교육을 받기위해서 서울로 와서 박정희와 함께 한 달쯤 머물렀다. 6연 대장최남근은 매주 한번 꼴로 박정희를 찾아와서 데리고 나가는 것이 었다. 어느 날 최남근이 '한중위도 같이 나가지'라고 했다. 박정희가 얼른 '저 친구는 공부하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갑시다'라고 말렸다. 몇년 뒤 박정희는 한웅진에게 '그때 최남근이 너를 포섭하려고 했는데 내가 말린 것이다.
너무 어리다고. 나와 최남근은 그때 효자동 이재복 의 집을 출입하고 있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한웅진의 1987년 증언). 한웅진은 이재복, 박정희와 셋이서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재복은 '내 조카에게 신경을써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박정희의 외삼촌으로 행세하고 있던 이재복이 한 말은 그 몇 달 전한웅진이 박정희를 친척 처녀에게 중매한 일을 두고 한 것이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