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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숙군수사팀에 구속된 박정희 소령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이현란에게 쪽지를 써 고백한 내용 -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는 데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여덟 살 아래인 그녀 에 대한 박정희의 집착은 대단했다. 만약 이때 이현란이란 여인이 없었 고 박정희가 달아났다면 그의 생애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잡혀와 처형되었든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든지 월북했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형선고를 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면 6·25동 란이 터지고 정부가 후퇴할 때 다른 좌익수와 함께 '처리'되었을 가능 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애절한 고백은 그러나 '빨갱이가 싫어서 월남했는데 빨갱 이 마누라라니'하면서 배신감을 가누지 못했던 이현란에게는 효과가 크 지 않았다. 이현란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구속된 얼마 뒤 조카 박재석과 한 여인이 서울로 올라와 관사로 찾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이 현란에게 '재옥이 엄마(편집자 주-박정희의 본처 김호남)가 알게 될지 모르니 서대문형무소에 면회를 다니지말라'고 하더란 것이다. 박재석과 같이 온 여인은 박정희의 죽은 형 박상희와 친한 서울 여자였는데 이현 란을 보고서는 '이렇게 참한 색시가 어쩌나'라면서 김호남이 가출한 이 야기,박정희가 이혼수속을 하려고 했으나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이 현란은 이때 처음으로 박정희가 결혼하여 열한살 딸이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포되기 전 어느 날 박정희는 이현란의 손을 잡고 한참 쳐다보더니 '참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의아했는데 일이 닥 치고보니 '말 못할 사정'을 전달하려 한 것임을 알았지만 이현란은 '배 신감으로 용서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아내로 맞을 때 암시를 주었어야지. 장가를 가서 아이까지 낳았 다고 하니 정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이성의 '이'자도 모르는 여자인데 도저히 이해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군적도, 사랑도, 나중엔 어머니도 잃게 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풍전 등화로 내몬 박정희의 '좌익모험'이 '지옥의 계절'로 그를 인도한날은 1948년11월11일이었다. 그의 체포를 알려주는 공식 문서는 국내에 남은 것이 없다. 박정희를 연구하고 있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과 과장 카터 J 에커트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한국군 헌병사령 관 담당 미군사고문관 보고서'에 박정희의 이름이 등장한다. 고문관 W H 세코 대위가 한국군 참모총장 담당 미군 고문관에게 보고한 이 문서(1948 년11월12일자)에는 '반란행위로 구금된 장교들 명단'이란 제목으로 7명 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영섭 사령관(국방부, 1948년11월8일 체포, 채병덕 대령의 명령에 따라), 나학수 소령(공병대대,10월26일, 송호성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안영길 소령(공병대대, 11월11일,군수지원부대 사령관 명령), 안기수 소 령(병기부대,11월10일, 병기부대 사령관 명령), 최남근 중령(4여단 참모 장, 11월11일, 송호성 사령관 명령), 오동기 소령(14연대장, 10월1일,송 호성 사령관 명령),박정희 소령(육군본부 작전교육국, 11월11일, 채병덕 대령 명령)'.
 
 왜 박정희가 채병덕대령의 명령에 의해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 다.그때 채대령은 지금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총참모장이었고육군 참모 총장은 이응준대령이었다. 박정희를 체포한 것은 국군의 모체로 불리는 1연대의 정보주임 김창룡소령이었다. 초대1연대장은 채병덕이었고 그는 김창룡이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몇 안되는 장교들 중 한 사람이었다.김창 룡이 채병덕의 결재를 얻어 박소령을 체포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를 살리는 데도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
 
 유년기의 국군에 피바람을 부르게 된 숙군수사는 김창룡이란 인물을 한국 현대사의 무대에 악역으로 등장시킨다. 일제시대엔 관동군 헌병하 사관, 국군에선 특무대장, 그리고 1956년에 40세로 암살될 때까지 '빨갱 이'란 말에 이를 갈면서 군내의 좌익숙청을 일생의 천직으로 삼았던 그 에 대한 평가는 천당과 지옥만큼이나 엇갈린다.
 
 '일제시대의 고문기술자들을 부리면서 관제빨갱이를 양산한 이승만의 충복'에서 '군내의 공산세포를 미리 제거하여 6·25동란 때 국군의 붕괴 를 예방한 구국의 영웅'까지 인물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김창룡. 그가 여자와 부패를 멀리하고 부하들을 반공이념으로 의식화시켜 그야말로 악 귀처럼 공산당과 치열하게 대결해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함남의 영흥에서 출생한 그는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제 관동군의 헌 병하사관으로 있으면서 주로 소련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을 적발하는 일 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친구와 친척의 고발로 두 번이나 소련군에 체포되어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고 두 번 다 탈출하 여 1946년4월에 월남했다.
 
 김창룡은 서울 역 앞에서 거적대기를 쓰고 열 흘을 지내다가 관동군 정보하사관 출신인 친구 박기병에게 발견된다. 박 기병은 일찍 군대에 들어와 연대장이 되어 전북 이리에 있는 3연대로 부 임하는 길이었다. 박기병은 김창룡을 3연대의 본부중대장으로 있던 이한 림부위한테 보냈다. 허름한 군복차림에 머리를 빡빡 깎은 김창룡은 운동 화를 신고 있었다.
 
 '이 부위님, 무슨 일이건 좋으니까 공산당 때려잡는 일만 맡겨주시면 생명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공산당놈들에게 복수할 곳만 정해주십시오.'.
 
 이한림은 '초면에 벌써 집요하고 무서운 강기가 여지 없이 번득이는' 김창룡을 이등병으로 입대시켰다. 여섯 달 뒤 김창룡은 상관의 추천을 받고 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했다. 김창룡은 '나는 3기생의 8할이 적색 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오일균생도대장, 조병건교수부장, 김학림중 대장이 공산당 지령을 받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간파했다'고 한다. 김창 룡은 졸업한 뒤 1연대 정보장교로 부임했다. 그는 1연대 정보반을 군내 좌익수사의 본산으로 만들었다. 국군지휘부에서는 좌익수사를 꺼리고 있 을때 김창룡만이 우직하고,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여순14연대 반란사건이 나자 비로소 군 수뇌부는 김소령에게 좌익숙 청의 실무를 맡긴다. 박정희는 이 김창룡에게 걸려든 것이었다.(계속)./
 
 (조갑제 출판부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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