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라이트뉴스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기사 확대  기사 축소  

백선엽의 결심
 백선엽의 결심
 
 항공사관학교 김정렬 교장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박원석 교수부장을 구해내려면 상선으로 되어 있는 박정희의 무고함을 증명하면 될 것 같 았다. 그래서 수사책임자 김창룡 소령에게 다짐하듯 재차 물었다.
 
 '만약 박정희 소령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어 풀려나온다 면 어떻게 하겠소?' '그야 박원석이는 자동적으로 풀려나오게 되겠죠.'.
 
 '박정희가 빨갱이가 아니면 박원석은 그저 나오는 것이오?' '예, 그렇습니다.'.
 
 김정렬은 육군참모차장이던 정일권 대령을 찾아갔다. '만군 후배인 박정희가 빨갱이로 몰려 있으니 살려내라'는 식으로 다그쳤다.
 
 '지금 김창룡이가 나까지 빨갱이로 보고, 나를 못 잡아서 안달인데 내가 어떻게 하겠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참모차장인데 한번 따져볼 수는 있지 않 습니까?' '아이고! 김창룡이 이야기는 하지도 마시오.'.
 
 김정렬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을 찾아갔다. 백 대령은 숙군수사의 총책임자였다. 백선엽 대령도 김정렬의 구명요청에 대해 난색을 보였 다. 그도 '형님, 말도 마십시오. 김창룡이는 지금 나를 잡아넣지 못해 서 안달입니다'라고 하더란 것이다(김정렬 회고록).
 
 이에 대해서 백선엽 전 육군대장은 '김정렬씨가 와서 박원석 대위 를 선처해달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박정희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김 창룡은 나의 지시를 잘 따르는 부하였다'고 말했다.
 
 김정렬은 일본 육사5기 선배인 채병덕 준장의 갈월동 자택을 찾아 갔다. 그는 지금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총참모장으로 있었다. 김정렬 교장의 말을 듣더니 채병덕은 즉시 김창룡을 불렀다. 김정렬은 다른 방으로 피했다. 김창룡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려보낸 뒤 채병덕은 김정 렬을 다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데 풀 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
 
 김창룡이가 제시한 '살릴 길'은 이러했다.
 
 '수사관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갈 때 열번만 박정희 소령을 앞 세우고 동행한다. 만약 박정희가 남로당 세포가 아니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 도 열번을 배신하게 만들면 그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전향하지 않 을 수없을 것이다'.
 
 설명을 마치자 채병덕은 김정렬에게 물었다.
 
 '박정희 소령이 거기에 응해줄까 몰라.' '아, 그거야 물론 당연히 응하겠죠.'.
 
 다음날 일찍 김정렬은 다시 김창룡을 찾아갔다. 박정희가 적극적으 로 협력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데는 한 보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김창룡이 아무리 숙군수사의 실력자라고 해도 박정희 를 마음대로 풀어줄 수는 없었다. 절차를 밟아야 했다. 전국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던 숙군수사를 총괄 하고 있던 것은 육본정보국 특무과장 김안일 소령이었다.
 
 이 특무과는 SIS(Special Investigation Section) 이라불렸다. 이 과는 곧 육군특무대로 확대되고 이 부대가 방첩대, 보 안사령부로 바뀌면서 두 대통령, 두 정보부장을 배출하는 등 한국 현 대사를 주름잡는 권력기관으로서 역사의 전환기때마다 중심적 역할을 하게된다. 김안일은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려주자고 해서 그를 지금 조 선호텔 근방에 있던 특무과 사무실로 불러 직접 신문했다.
 
 '그는 자포자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생에 애착이 있 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적으로 태연한 척하는 것도 아니고. 그 래서 내가 백선엽 국장에게 살려주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는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주어도 안심할 수 있 다고 판단한 겁니다.'.
 
 백선엽 국장은 김안일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 소령을 면담하기로 했 다. 김안일이 수갑을 찬 박정희를 데리고 정보국장실로 들어와서 백 국장옆에 앉았다. 백선엽은 석달 전 여순 14연대 반란군토벌사령부의 참모장일 때 박정희 소령을 작전장교로 데리고 있었다.
 
 마주 앉은 박 정희의 모습은 처연했다. 생사의 기로에 선 한 연약한 인간이 생명을 애원하는 순수한 모습, 그것이 백선엽을 움직였다. '저를 도와주십시 오'라는 박정희의 애원에 백선엽은 무심코 '도와드리지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백선엽 장군은 지금도 그 결정적인 말이 '무심코' 나왔다고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이 결국 그를 살린 것입니다.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어 떻게 살리나 하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통수계통을 따라 재가를 받 아야했으니까요. 그분이 살아난 것은 간단합니다. 저와 직접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숙군수사 책임자인 저에게 아무도 박정희를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수사선풍이 불고 있을 때인데 감히 저에 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을 때였습니다. 저 앞에 앉아 있던 그분의 모 습, 거기에 저의 마음이 움직인 겁니다.'.
 
 개인적 친분으로 친다면 최남근 중령이야말로 백선엽이 구해야 할 인물이었다. 최남근은 봉천군관학교 선배이고 간도특설대에서 같이 근 무했으며 함께 38선을 넘어와 같은 날 임관하여 군번도 백선엽 바로 앞이었다. 그런 백선엽은 숙군수사가 시작되자 잠적한 최남근을 체포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되었다.
 
 김안일의 기억에 따르면 김창룡 이 박정희 구명사유서를 겸한 신원보증서를 적어 자신과 함께 백선엽 국장에게 갔다고 한다. 백 국장은 '너희들도 여기에 도장을 찍어'라고 하여 세 사람이 박정희의 신원보증인이 되었다. 붉은 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던, 저승사자 같은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렸다는 것--. 우리 현대사의 뒤안길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기구한 인연중의 하나이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기사목록  프린트하기 

조선일보 | 스포츠조선 | 주간조선 | 소년조선 | 여성조선 | NK조선 | IT조선 | 잡지DB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 오피시아 1729호  |  대표자 : 조갑제  |  사업자등록번호 : 101-09-63091
상호 : 조갑제닷컴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동현  |  전화번호 : 02-722-9411~3  |  팩시밀리 : 02-722-9414 |
    개인정보취급방침

발행인 : 조갑제 | 편집인 : 조갑제 | 등록번호 : 서울아00945 | 등록일 : 2009/08/24 | 국민은행 360101-04-065553(예금주: 조갑제닷컴)
webmaster@chogab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