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어머니의 죽음
1948--49년의 숙군 수사는 일제시대에 독립투사와 공산주의자들을 추적했던 일제고등계 형사들과 헌병출신들 수십 명을 군수사기관에 모으는 계기를 만들었다. 숙군 수사가 확대되자 육군은 전문수사요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때 국회는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친일경찰출신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피난처삼아 군 대로 들어왔다. 일제 헌병과 고등계에서 봉사했던 이들은 숙군수사에 공과를 남겼다.
그들은 사상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어본 경험을 살려 마구잡이로 붙들려 와있던 억울한 피의자들을 많이 가려내 풀어주었다. 그들은 한편 고문의 기술자들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우리 정보 수사기관의 고질이 된 고문과 조작, 그리고 정치개입의 뿌리가 이들과 연결된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친일파의 손 으로 좌익을 제거하는 이이제이의 전술이었다.
지난 회에 실린 병색의 박정희 모습과 전혀 다른 사진이 하나있다. 1949년 4월초 박정희 소령이 전투정보과 직원들과 태릉으로 야유회를 가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야유회란 성격 때문인지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모두 밝다. 박정희는 드물게 웃고 있고 후임 과장 이후락 소령은 소년 처럼 쾌활한 표정이다.
박정희 옆에 앉은 동거녀 이현란은 학생복 같은 흰옷을 입고 있는데 작은 사진에서도 미모가 눈에뜨일 정도이다. 이야 유회 며칠 뒤의 일이다. 과의 선임하사 김이진일등상사는 서무직원 김 인생을 육군본부로 보내 문서를 수령해 오게 했다.
문서를 먼저 열람하던 김상사는 깜짝 놀랐다. 무기형에서 징역10년 형으로 감형된 박정희의 형집행을 면제하고 파면한다는 내용이었기 때 문이다. 언제나 그러듯 김이진은 자신의 도장을 찍고 서류를 박정희의 코 밑에 살짝 내밀면서 작은 목소리로 '과장님!'이라고 불렀다.
박과 장은 문서를 한번 훑어보더니 '응, 알았어'라고 하는데 꼭 남의 이야기 하듯 했다. 이 과에서 근무한 지 두 달밖에 안되는 김상사는 그때 처음 으로 과장의 '과거'를 알았다고 한다. 김이진은 그날만은 사병들을 모 아놓고 명령서를 낭독하는 일을 생략하고 문서철에 철해놓기만 했다.그 다음날 박정희는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군복을 벗고 까만 양복을 입고 있었다. 후임 과장인 이후락은 사무실 안의 한쪽에다가 박정희의 책상 을 배치했다.
박정희를 살려주고 그 뒤를 봐준 백선엽정보국장은 파면된 박정희를 계속해서 근무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백국장은 기밀비에서 매달 조금씩 떼내어 박정희의 월급을 마련하도록 했고 지프차도 계속해서 쓰게 했다. 일부 기록은 이 시절의 박정희를 문관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는 공무원 도 아니고 정식 고용인도 아니었다. 북한반 안에 상황실이 있었다.
박정희는 직제에는 없지만 이 상황실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49년에 들 어서면 지리산, 소백산, 한라산에서 공산 빨치산의 활동이 격화되고 있 었고, 옹진반도에서는 북한 인민군과의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 서와 부락 습격, 탄약과 식량탈취, 북한에서 내려보내는 빨치산 토벌등 정세는 이미 전면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상황실의 지도에는 붉은 전투지역표시가 늘고 있었다.
1949년 5월4일에는 춘천에 본부를 둔 8연대 산하 1,2 대대를 좌익성 향의두 대대장이 인솔하여 집단 월북해버리는 사건이 났다. 1대대장 표 무원소령은 실탄을 휴대하지 않은 대대 병력을 끌고 대북시위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38선을 넘어갔다. 그리고는 '인민군에게 포위되었으니 항복하자'고 했다. 일부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인민군에게 신호를 보내 위협사격을 요청했다. 2백39명의 장병은 남으로 탈출하고 2백17명 이 월북하고 말았다. 같은 날 2대대장 강태무소령은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38선상의 고지를 공격한다는 허위명령을 내리고는 부대를 돌격시 켰다.
매복하고 있던 인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포위되자 강소령은 부 대를 끌고 항복해버렸다. 3백82명의 장병은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 했고 3백68명은 대대장을 따라 월북했다. 8중대 김인식중위는, 교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위장 귀순한 인민군 2명이 교전이 시작된 뒤 본색을 드러내고 '우리가 길을 안내할테니 월북합시다'고 제의하자 사살해버렸 다. 김중위는 혈전을 벌이면서 퇴로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다.
표무원, 강태무 두 소령은 남로당에 가입도 하지 않았지만 불순분자 라는 의심을 받아 언젠가는 체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지내다 가 월북했다는 이설도 있다. 이 2개 대대의 월북사건으로 이응준육군총 참모장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는 국방부 참모총장(요사이의 합참의장에 해당) 채병덕준장이 전보되었다. 이응준 장군은 김창룡 소령이 강, 표 소령을 구속수사하겠다고 결재를 올렸을 때 '38선을 지키는 부대장을 함부로 그럴 수는 없다'면서 부결했던 책임을 진 것이었다.
월북한 2개 대대는 8연대 소속이었는데 연대장 김형일중령은 소령자 리인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좌천되어 왔다. 전임 이후락 소령 은 병참차감으로 전보되었다. 김형일은 이 월북사건으로 혼이 난 때문 인지 전투정보과에서 만난 남로당 전력자 박정희를 곱게 보지 않았다. 두사람은 1960년 4·19 뒤에도 격돌하는데 이는 5·16의 한 요인이 된 다. 김형일은 곧 다른 직책으로 떠나고 박정희와는 경비사관학교 동기 생 사이인 김재현 소령이 후임과장으로 부임했다.
1949년 여름에 어머니 백남의가 일흔여섯의 나이로 별세했다. 마흔 넷의 나이에 박정희를 임신한 것이 부끄러워 이 생명을 떼려고 온갖 수 를 다 써보았던 어머니는 막상 아들이 태어나자 미안한 마음까지 더 얹 어서박 정희에게 사랑의 단비를 흠뿍 쏟아 부었다. 그것이 박정희의 인 격을 만든 결정적인 토양이었다. 백남의는 아들의 성공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박정희가 일생중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그 만큼 박정희의 슬픔도 컸을 것이다. 박정희는 동거녀 이현란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본처 김호남은 큰딸 재옥을 데리고 집을 나가고 없 었다. 이현란은 박정희의 생가를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오는 곳'이라고 기억했다. 이현란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일가가 나서서 '대학생 제수씨가 온다고, 서울 멋쟁이라고 야단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광목 에 물들여 옷을 해입고 나와서 떡해준다고 방아도 찧고 했지만' 이현란 은 '하룻밤만 자고 혼자서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계속).
(조갑제 출판부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