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 속의 이별
전투정보과에서 1949년말에 작성한 '연말 적정판단서'는 북한이 남침할 때 예상되는 주공과 조공 방향도 거의 정확하게 예상했다. 즉, 의정부-서울을 주공으로 삼고 개성-서울과 화천-춘천-서울남쪽 우회 노선을 조공으로 삼아 남침할 것이며, 주문진과 옹진에서 견제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 했다.
이 판단서는 그 원본이 남아있지 않아 관련자 들의 기억에 의존할수 밖에 없다. 김종필은 상황실장 역할을 하던 박 정희의 주재하에 북한반의 자신과 남한반의 이영근중위가 중심이되어 이 판단서를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유양수 당시 전투정보과장(육군소 장, 동자부장관 역임)은 이 보고서는 과원들 전체가 참여하여 만든것 이지 누구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할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다.
김종필의 기억에 따르면 이 판단서는 남침 시기에 대해서 '1950년 3월이 될 것이나 동북한인의용군의 북괴군으로의 편입이 지연될 경우 에는 6월이 될것이다'고 정확히 예언했다는 것이다.그 편입은 1950년 5월에 끝나 남침이 6월로 연기되었다는 주장이다.이 판단서는 또 '소 련은 직접 개입하지는 않겠지만 중공은 경우에 따라 직접 지원할 것 이다'고 예측했다.
이 판단서는 국방부, UN한국위원단, 미군사고문단, 우리군의 사 단급 부대에 배포되었다. 전투정보과는 이 판단서를 기초로 하여 군 수뇌부에 대해서 설명회도 자주 가졌다. 군 수뇌부에서는 미군사고문 단측에 대해서 남침위협을 강조하고 군사지원, 특히 대전차무기의 제 공을 여러번 요청했다. 미군측에서는 '스탈린이 도발한다면 유럽에서 할 것이다.
전차는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대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말 만 되풀이했다. 미국은 오히려 이승만정부가 북진하지 않을까 우려하 고 있었으니 군사지원을 해줄 리가 없었다. 우리 군수뇌부는 미군의 이런 냉담한 태도에 직면하여 무력증을 느끼고 있는데 일선에서는 계 속해서 '남침 임박'이란 정보 보고가 올라오니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 도 났을 것이다.
유양수에 따르면 이런 상층부의 영향을 받았는지 장도영 정보국 장도 그런 정보보고가 올라오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자 신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전투정보과 상황실장 박정희는 '남침임박'이란 경보를 보내면서 다가오는 전운을 누구보다도 예민하 게 느끼고 있었다.
한편 북한의 전쟁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1949년 1월31일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군은 북경에 무혈입성했다. 중국 통일에 고 무된 김일성은 3월에 남침 계획서를 가지고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그 는 스탈린에게 남침에 따른 각종 지원을 요청하여 동의를 받았다. 김 일성은 이어서 모택동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중국군에는 약 3만 명의 조선족 중국인 장병들이 근무하고 있었다.이들을 인민군에 편입 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모택동은 승인했다.
3개 사단의 병력에 해당하 는 3만 조선족장병은 중국공산당의 환송을 받으면서 1949년말부터 비 밀리에 북한으로 이동한다. 북한정권은 이들을 받아들여 당적을 중국 공산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고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김일성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명분아래서 한반도문제에 소련과 중국의 개입 을 유도한 것이다. 우리 민족문제에 외군의 간섭을 먼저 부른것이 바 로 '사대주의자' 김일성이었다.
1949년 여름 중국으로부터 조선족 장병들이 들어오면서 인민군의 증편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제5, 6, 7사단은 주로 이 조선족장병들 로 구성되었다. 인민군의 1개 사단은 1만1천명. 10여만명의 소련군이 철수할 때 남기고 간 전차와 소련으로부터 새로 들어온 전차를 받아 서 105전차여단이 만들어졌다.
1949년 5월 5일부터는 인민군 병사 징 모 작업이 시작되었다. 공민증 교부연령을 20세 이상에서 18세이상으 로 낮추어 병력자원을 불렸다. 인민군은 1949년 12월부터 다음해 5월 까지 동기 전투훈련을 실시했다. 민족보위상(국방장관에 해당) 최용 건은 6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하기 전투문화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 한다(여기서 문화란 정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남침준비 작업을 훈련 으로위장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적기)' 의 평양특파원을 지낸 하기하라 료는 6·25동란 때 미군이 노획한 북 한문서를 근거로 하여 남침과정을 파악했다. 그는 이 과정을 '조선전 쟁'이란 책으로 썼다. 이 책은 북한자료로써 남침과정을 정밀하게 재 구성했기 때문에 6·25동란이 북한의 남침에 의하여 비롯되었다는 것 을 그들이 자백한 셈이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인민군은 훈련을 위 장하여 38선으로 남진하기 시작하여 6월 15일 전후에는 38선 이북 10- 30km부근에 집결하였다.이들은 6월22일과 23일에는 38선 후방 5백m에 전개하여 공격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반도를 피바다로 몰고갈 거대한 폭풍의 구름덩어리가 형성되고 있던 이때 박정희의 가정 생활도 서서히 파국로 치닫고 있었다. 이현 란과의 싸움은 박정희가 손찌검을 하는 정도로 발전하여 용산의 관사 촌에서도 알려지고 과원들도 짐작할 정도였다. 이현란이 멍이 든 얼 굴을 하고 다니고 옆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현란은 1950년2월 6일 밤에 몰래 관사를 나와 박정희와 영원히 헤어진다. 두 사람은 싸 움을 한 후인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박정희는 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자는데 이현란은 메모를 써놓고 몸만 빠져나왔다는 것이다.메 모의 내용은 '그동안 고마왔어요.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나를 찾지 마세요. 나를 찾으러 오면 투신자살하겠어요'라는 요지였다.
이현란이 며칠 뒤에 나타나서 자신의 소유물을 싣고 가는 것을 목 격한 사람이 있다. 같은 과에서 근무했고 같은 관사촌에 살던 한무협 대위였다. 1950년에 첫 봄비가 내린 날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저녁 에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짐 실은 트럭을 타 고나오는 이현 란을 보았다. 두 사람은 트럭을 가로막고 '가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트럭은 돌진하여 한무협은 몸을 급히 피하여야 했다고 한다.
박정희에게 이현란의 가출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성격이 서로 강 해서 자주 부딪히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든지 함께 살아보려고 노력한 쪽은 박정희 였다. 이현란의 박정희에 대한 정은 냉담해갔지만 박정 희의 그녀에 대한 연정은 그럴수록 더 절박해졌다. 직업과 어머니와 미래까지도 모두 잃었던 박정희가 붙들고 있던 유일한 끈은 이현란이 었다.그녀가 떠난 것이다. 박정희는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