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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예보
 남침예보
 
 1949년7월 김재현 육본 전투정보과장이 전보되어 나가고 선임장교 유 양수 대위가 소령으로 승진하면서 후임이 되었다. 유 소령은 직속상관이 던 박정희를 부하로 데리고 있게 된 것이다. 유양수 소령은 육사 7기 특 별반 출신이다. 이들은 군경험자들로서 6개월 간의 교육을 마친 뒤 소위 로 임관되었다. 동기생은 이주일(국가재건최고회의부의장, 감사원장 역 임), 정래혁(국방장관, 국회의장 역임), 장경순(국회부의장 역임), 유병 현(합참의장, 주미대사 역임)등 1백80여명이다. 유양수는 생도시절에 중 대장이던 박정희 소령을 만났다. 그것도 사고를 통해서였다.
 
 1948년 8월 20일 주번사관 손관도 중위가 군기를 잡는다고 생도들을 구보시켰다. 퇴계원을 돌아오는 10㎞의 거리였다. 뙤약볕에서 뛰다가 두 생도가 일사병 으로 쓰러졌다.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박정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병장에 나오더니 '누구 나하고 함께 찾으러 갈 사람 없나?'라고 했다. 유양수가 자원하여 박정희와 함께 지프를 타고 구보한 길을 거꾸로 더듬 다가 개울가에 엎드린 채 죽은 한 생도를 발견했다. 다른 생도는 다른 수색반에 의해 역시 시체로 발견되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 유양수 과장은 한때의 직속상관을 부하로 데리고 있으면서 박정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박정희 또한 이런상황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정리된 원칙을 가진 사람 이라 두 사람은 갈등이 없었다. 신임 유양수 과장은 곧 신임 정보국장 이용문 대령을 맞게 되고 두 사람은 북한 인민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에 신경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1949년 하반기부터 정보국에서는 북한의 군 사활동이 활발해지는 동향을 추적하면서 이들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런 보고를 상부에 올리면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이용문은 개의치 않고 남침 가능성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계속해 서 올렸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미군보를 더 믿는지 정보국의 보고를 경 시하고 있었다. 유양수 소령이 보기에는 신 장관이 군사정보까지도 정치 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이용문 정보국장은 대북첩보공작뿐 아니 라 대북선전공작을 강화하고 일본, 홍콩에 해외정보망을 구축하려는 구 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령은 문총에 부탁하여 대북심리전 요원으로 일할 문필가를 추전 해 달라고 했다. 소설가 최태응, 시인 조영암, 시인 구상이정보국 첩보 과 안에 있던 '선전모략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구상만 상임이었다. 구상은 '봉화'란 지하신문을 만들어 북한지역으 로 보내는 일을 했다. 구상은 세 살이 많은 이용문과 아주 친해졌다. 이 인연이 확대되어 박정희와도 친구가 되는데 그것은 3년 뒤의 이야기다. 이용문은 일본 공산당이 남로당을 지원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부산에 특 별방첩대를 설치했다. 기관포를 단 세 척의 경비정을 운용하면서 일본으 로부터의 영향을 차단하려고 했다.
 
 유양수는 '이용문 국장은 사물을 멀리, 그리고 넓게 볼 수 있는 특출 한 분이었다. 사심이 없으니까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고 평했다. 이 무렵 아주 흥미있는 인물이 이용문-박정희 인맥에 끼여든다. 5·16거 사를 준비할 때 장면정부를 상대로 정보교란 전술을 구사했던 장태화(전 서울신문 사장). 장태화는 이용문의 보좌관이 소개하여 그를 만났다.
 
 이 국장은 정치정보를 담당할 문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나라가 이제 처음 제 모습을 갖추어가는 단 계라서 능력있는 사람이 아쉽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정보국장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부터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잘 생긴 대장부의 진심이 담긴 정중한 말에 끌린 장태화는 다음날부 터 국장실 문관으로 일하게 된다.
 
 이 무렵 박정희는 여러 장교들이 부탁하는 문건을 대필해주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보고서를 잘 쓴다는 소문이 자자하 여 대필의뢰가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남한반장 한무협 중위가 하루는 관사에 가보니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한중위가 '뭘 그렇게 쓰십니까'라고 물으니 박정희는 예의 부끄럼타는 표정을 짓 더니 문건을 쓸쩍 보여주면서 말했다.
 
 '뭐, 나 보고 부탁하는데 써줘야지.'.
 
 이럴 때 박정희가 책상 위에 두고 참고로 하는 책이 딱 한 권 있었 다. 일제육군의 교육총감부가 발간한 '정황판단'. 이 책은 각종 보고서 양식을 소개하고 지휘관이 작전, 정보, 인사, 군수 등 전문분야를 서로 연계시키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지침서였다.
 
 정보국에 근무할 때 박정희의 머리속에서 체계화된 정보판단과 보고 서 작성 요령은 대통령이 되어 국가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소중하 게 활용된다.
 
 1949년10월 이용문 정보국장은 그때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옹진지 구 전투사령관으로 전보되어 나갔다. 이용문은 박정희에게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하여 박정희가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명령이 취소되었다. 후임 정 보국장은 5·16때 박정희와 운명적인 관계에 서게 되는 장도영 대령이었 다.
 
 성품이 선하고 명랑한데 정치적이란 평을 들었던 장 대령은 전임자와 는 대조적이었다. 박정희와는 육군사관학교 간부로 같이 근무할 때 잠시 스친 정도였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으나 아직은 친밀해지기 전이었 다.
 
 장도영은 나이는 박정희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다. 장도영 국장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상황실에 자주 들러 적정을 자주 파악하여야 했던 나는 박정희를 자 주볼 수 있었다. 항상 사복차림으로 의기소침하게 있던 그를 퍽 가엽게 생각하여 때때로 사담도 나누고 때로는 그의 생활에 관한 것도 알아보았 다'.
 
 이 무렵 전투정보과는 유양수 과장의 지도 하에 '연말종합적정판단서' 를 만들고 있었다. 연례적인 보고서였지만 북한의 전쟁준비상황이 감지 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남침 가능성을 검토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1949년 12월17일에 육본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이 판단서의 총론부분은 박정희가 썼다고 한다. 이 판단서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전기능을 동원하 여 전쟁준비를 갖추고 나면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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