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이룡문
5·16 거사 이전 박정희의 생애를, 군사쿠데타를 위한 인맥형성 과정 이란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1949년 말에 벌써 기본적인 포석이 이뤄진 상 태였다. 물론 박정희가 계산적으로 그런 인맥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흘러가는 인연속에서 박정희의 능력과 매력에 의해 특수한 인간관계 가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인맥, 육사 중대장 시절의 생 도 인맥(특히 5기생), 그리고 전투정보과에서 만난 8기생 인맥. 이들은 5·16을 성공시킨 3대 인맥이다. 박정희는 나이가 직속상관이나 동료들 보다 3∼5세 가량 많았고 말수가 적은 데다가 부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했 다. 상관들이나 동료들은 그를 어려워 했고 부하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 었다. 8기출신 이영근(전 유정회 총무 역임)은 '박정희 실장의 가장 큰 욕은 '그 자아식'정도였다'면서 '이런 분이 부하들에게 어떻게 기합을 넣는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부하들을 조용히, 그러나 꼼짝 못 하게 장악하는 비결이 있었다. 당시 그는 민간인인데도 청년장교들이 올 리는 서류를 검토하고 때로는 결재도 했다. 처음에는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서명을 해주는 것같았다. 그래서 장교들이 해이해져 있을 때쯤이면 문서 하나를골라 꼼꼼히 읽어보고는 철자법이 틀린 것까지 들 추어내 고쳐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며시 작성 자의 책상 위에 갖다 놓는다.
문서가 엉망이라도 박정희는 그냥 고개를 갸우뚱할 뿐 대놓고 질책하 는 일이 없었다. 이러니 장교들은 더 긴장하게 되었다.
1949년 7월 30일 백선엽 정보국장은 5사단장으로 승진하여 나가고 후 임으로는 기갑연대장 이용문 대령이 들어왔다. 겉으로 좀처럼 드러내지 는 않지만 가슴 깊숙이는 아주 높은 자존심과 엘리트의식을 파묻어두고 있어 웬만해서는 자신을 굽히지 않는 박정희에게도 이용문은 아주 큰 사 람이었다. 이용문은 그때 나이가 서른셋이었지만 벌써 소설을 몇 권 쓸 만한 모험을 거친 풍운아였다.
그는 박정희보다 한 해 먼저 평양에서 났 다. 아버지는 큰 곡물상이었고 바로 위의 형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이 용운. 그는 평양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동급생 가운데는 6·25남침 때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화가 이중섭이 있었다. 쾌활하고 장난질 좋 아하는 이용문 소년은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채병덕과 이종찬(육군참모 총장, 국방장관 역임·작고)보다 한 해 늦게 일본육사에 들어갔다.
기수로는 박정희보다 7기나 앞인 50기였다. 이용문은 육사를 졸업하자 기병장교가 되어 도쿄에 주둔하고 있던 근위부대인 제1기병연대에 배속 되었다. 빨간 바지를 입고 샤라브레드 준마를 탄, 쭉 빠진 미남자 이용 문은 같은 부대 소속의 니시 대위가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 하여 마술에서 금메달을 따 국민적 영웅이 된 분위기에 힘입어 어디를 가든지 무리 속에서 눈에 확 뜨이는 청년장교였다.
스물세 살에 결혼하여 장남 이건개(현 자민련 국회의원)를 얻은 이용 문은 만주에서 근무하다가 1942년부터는 대본영으로 불린 일본군 참모본 부에 있었다. 그는 엘리트 장교들이 근무하는 이곳에서 1년 남짓 있다가 남방전선으로 나갔다.
김정렬(공군참모총장, 국방장관, 국무총리역임· 작고) 등 일본육사 동창생들의 추억담에 따르면 통이 큰 이용문은 어딜 가든지 소좌(소령)이면서도 장관과 같은 호화판 생활을 하더라는 것이다. 후배들이 찾아가면 어디서 그런 음식을 구해오는지 질펀한 향응을 베풀 어주었다. 이용문 소좌는 사이공에서 패전을 맞았다.
월남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17도선 이북은 장개석군대가, 이남은 영불 연합군이 진주하여 일군을 무장해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군은 연합군 에 반발하여 갖고 있던 물자와 무기를 호지명부대에 건네주기도 했다.프 랑스가 다시 월남을 지배하려는 데 대한 반감을 공유하고 있던 일군과 호지명 부대는 심정적인 동지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용문은 호지명 군 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더구나 그는 군수참모였으므로 물자를 팔아 거액의 군자금을 만들고 자신은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월남 민족주의자들 을 돕고 있었다. 일본육사 후배인 김정렬은 이때 무장이 해제되지 않은 일군부대를 지휘하여 사이공의 한 지역을 경비하고 있었다. 가끔 이용문 소좌가 귀띔을 해주는 것이었다.
'오늘 오후 3시쯤 OO에서 폭탄이 터질 거니 알아서 해!'.
그러면 영락없이 그 지점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김정렬 소좌가 '형님, 제발 내 관할 구역에서는 그러지 마세요'라고 하면 이용 문은 '야, 네가 모른 척하면 될 것 아냐'라고 하는 것이었다. 1946년4월 사이공에 남아 있던 한국인들을 태우기 위해서 일본 구축함 한 척이 입 항하여 김정렬은 귀국길에 올랐다. 이용문에게 같이 귀국하자고 했더니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야, 중국 대륙은 넓어'라고 했다.
이용문 은 1947년 9월에 홀연히 인천항을 통해서 귀국했다. 귀국할 때 마카오에 서 화물선 한 척을 구해서 물건을 잔뜩 싣고와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무역업을 하려고 했는데 창군에 참여한 선-후배들이 강권하여 정부수립 후인 1948년11월에 국군에 들어왔다. 육사 9기 특기생으로 들어와 바로 소령으로 임관했다가 한 달 뒤에는 중령으로 승진, 초대 기갑연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젊은 거인'의 풍모를 가진 이용문 정보국장은 단박에 박정희의 마음 을 사로잡았다. 형과 어머니를 잃고 동거녀 이현란과는 갈등을 계속하고 있던 박정희는 천의무봉한 호걸형 이용문에게 의탁하고 위안을 받으려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두 사람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외향적이고 호 방한 이용문에 대해서 은인자중하며 치밀한 박정희는 상호보완적 성격으 로 해서 더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은 대국을 보는눈이 있었다.
일제말기 에 만군과 일군에 있었던 조선인 출신 장교들은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 필리핀, 남태평양을 넘나들면서 전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국제 화된 안목을 갖게 되었다. 교과서적 지식을 가진 백면서생이 아니라 몸 으로 때워서 배운 국제감각을 가진 장교들이 창군 과정에 참여했다는 점 은 주의해볼 만한 대목이다.
박정희와 이용문은 서로의 안목을 인정한 바탕에서 '뜻을 같이 할 만한 사이'가 된다. 이용문은 누군가가 박정희 의 사상문제를 새삼 거론하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사나이 대장부가 한번 마음 고쳐 먹었으면 그만이지, 뭐.' 이용문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자기 일처럼 하면서도 생색을 내거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계속).
(조갑제 출판부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