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950년2월 이현란이 집을 나가버리자 박정희는 그녀를 찾아 사방 을 헤매고 다녔다. 이현란을 자신에게 소개시켜 주었던 이효소령의 부인 우씨에게 편지를 한 통 맡겼다. 우씨가 이현란을 찾아내 박정 희의 편지를 보였더니 그녀는 웃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이현란의 생 전증언에 따르면 가출한 뒤 한번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박정희가자신에 대해서 '교만하다느니 못됐다느니' 험담한다는 소문 이 들려와 화가 났던 이현란은 박정희에게 '비신사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넓은 관사에 혼자 남게 되었다. 서른세 살의 홀아비가 된 것이다. 박정희가 친구들을 배신하여 살아 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의 근처에 가지도 않으려 했다. 박정희도 자격지심에서 사람접촉을 피했다. 어머니도, 친구도, 연인도 떠난 1950년의 봄은 박정희의 생애에서 최악의 나날들이었다.
이때의 박정희를 아주 가깝게 관찰한 것은 육사2기 동기생인 한 웅진중령이었다. 당시는 이름이 한충렬이었던 그는 한웅진으로 개명 할 때 박정희와 의논할 정도로 형제처럼 가까웠다. 3연대 3대대장으 로서 지리산에서 여순14연대반란사건의 지휘자 김지회 홍순석을 사 살한 한웅진은 중령으로 특진하여 정보국 산하의 방첩부대(CIC)본부 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부대는 조선호텔 건너편에 대륙공사란 회사 간판을 걸고 활동하고 있었다. 보안사의 전신인 이 조직은아직 독립 부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한웅진은 방첩수사 책임자로서 박정희를 마음놓고 만날 수 있었고 박정희는 동생처럼 아끼던 네 살 아래의 한웅진을 하나의 보호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웅진은 결 혼하여 전주에 집이 있었지만 이때는 경교장 근방의 언덕바지(옛 고 려병원근방) 2층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퇴근한 뒤에 이 하숙집에 자주 놀러 왔다.
한웅진의 생전(생전)증언-.
'박정희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내 방에 기어들 어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나한 테 하소연을 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 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 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외면하고, 장래의 희망은 사라지고...그 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지요'.
이 한웅진은 5·16거사 때의 그 결정적인 순간에 박정희와 동행 자가 되어 한강을 건넌다. 그는 박정희의 가장 허약한 모습과 가장 강인한 모습을 다 본 사람이다. 박정희는 이 무렵 생활비가 모자라 육본 장교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꾸기도 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로 서는 아주 드문 행동이었다. 6·25남침 얼마 전에 박정희는 정보국 제5과장 차호성을 찾아오더니 자신의 복직탄원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숙군수사에 참여했던 장교가 서명을 해 주어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차호성은 흔쾌히 서명했다.
한국군의 대북 안테나 역할을 맡은 전투정보과는 업무의 성격상 다가오는 전쟁의 숨결을 가장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1950년 여름의 운명적인 나날들 속에 박정희 상황실장과 김종필 북한반 장교가 있 었다. 이 과로 몰려드는, 북한에 파견된 첩보원들의 보고, 고정첩자 들의 보고, 월남귀순자들의 보고, 전방부대로부터의 보고는 한결같 이 전면전의 임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포탄을 가득 실은 트럭이 남하중'이라는 첩보를 분석해보니 얼마전 대포가 실려간 행선지와 일치했다.
정보국의 첩보과 최영택)중위는 6명의 대북첩보원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시로 북한지역에 올라가서 정보를 갖고 오곤 했다. 5월에 들어온 정보로는 평양역장의 이야기가 있었다. 군인들을 태운 열차가 계속해서 남진하고 있는데 소련군 장교들도 끼여 있더라는 것이었다. 노동당 고위간부가 부인에게 귀띔한 이야기도 전해져 왔다.
6월15일 개성주둔첩보부대장 김경옥대위에게 긴급한 정보가 들 어왔다. 북한으로 잠입했던 첩보원이 '임진강에 도강용 주정 3백척 이 집결해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육본 정보국으로 보고했더니 미고문관이 '믿을 수 없다. 사진을 찍어오든지 현물을 가져오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첩보원을 다시 들여보내려고 했더니 그때까지 느 슨하던 38선은 철통같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북으로 잠입시켰던 첩보원들의 귀환율도 갑자기 떨어졌다. 38선 에 인민군 병력이 집중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생환 한 첩보원들은 38도선상의 긴장상태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38도선 주민들이 모두 후방으로 소개되었고 평양-원산선 이북에 있어야 할 부대가 38도선상에서 목격되었다, 민간인들도 공포에 질려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라 쑤군대고 있다···.
유양수(류양수)과장은 이런 긴박한 분위기를 상부에 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박정 희에게 지시하여 정보분석과 적정 판단업무를 종합 지휘하게 하고 작업반의 인원을 늘리는 한편 둔감한 상관들을 깨우치려고 애를 태 웠다. 첩보전선과 전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공감하고 있던 전 투정보과 사람들과 현장에서 떨어져 문서로써만 보고를 받는 지휘부 는 위기를 느끼는 감각부터가 달랐다.
'남침임박'이란 보고 자체를 짜증스럽게 여기는 상층부의 분위기 속에서유양수 과장은 고군분투했다.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의 이런 태도에 영향을 받아 장도영 정보국장도 전투정보과 에서 올리는 경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 유양수의 증언이 다.
장도영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장도영 의 회고록에 따르면 5월8일 그는 김백일 육본 참모부장과 함께 신성 모 장관을모시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긴박한 상황을 보고했다는 것이다. 김백일 대령은 '우리는 전차는 한 대도 없고 대포도 사정거 리가 짧은 경포뿐입니다. 공군은 독수리와 참새 격입니다'고 했다. 이승만은 흥분하더니 '미국사람들은 갈테면 다 가라고 해.
우리는 초근목피를 먹으면서도 공산당과 싸워야 해'라고 소리쳤다. 이대통 령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상황을 국방장관의 내외신 기자회 견으로써 알리도록 지시했다. 미군측은 북한의 군사력배치에 대해서 는 동의하면서도 '남침임박'은 아니라는 태도였다. 미군측은 북한의 '남침능력'은 인정하면서도 '남침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정보판단의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불확실한 주관적요소(의지)를 명백한 객관적 사실(능력)보다도 더 중시하면 오판을 하게 된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