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고개
25일 오전 6사단7연대 병력은 화천쪽에서 북한강 다리를 넘어오고 있 는 인민군 전차 두 대를 발견했다. 보병들이 전차를 따르고 있었다. 7연 대 공병팀은 전차가 다리 한가운데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폭파장치를 눌렀다. 다리는 터지지 않았다. 적의 포격으로 도화선이 끊어진 탓이었 다. 이번엔 57mm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전차에 명중했다. 7연대 장병 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 소리가 가라앉자마자 전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T-34형 소련제 전차는 일시 멈칫했을 뿐이었다. 우군의 무기 로는 어쩔 수 없는 괴물의 등장. 무력감 뒤에 공포감이 확산되었다.
서울을 북쪽에서 차단해주고 있던 임진강과 북한강, 그리고 그 지류에는 많은 다리가 걸려 있었다. 국군측 공병들은 이 다리를 폭파하는 데 실패 했다. 임진교, 영중교, 만세교, 의정부교, 창동교, 소양강교가 고스란히 인민군에 넘어가 그들의 서울접근을 도왔다. 유일하게 폭파에 성공한 다 리는 경춘가도의 중랑교. 탱크 공포증과 다리 폭파의 실패는 육군 수뇌 부에 하나의 공식을 입력시킨다. '탱크가 서울에 들어오면 한강다리를 폭파한다'.
박정희가 육군본부로 돌아온 27일 아침 국방수뇌회의가 열렸다. 신성 모 국방장관은 채병덕 총장 등 지휘관들에게 위스키를 한잔씩돌린 뒤 비 통한 말투로 서울포기를 선언했다.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이선근 정훈국장이 일어나더니대단히 선동적인 발언을 했다.
'해주를 점령하고 북진중이라느니 27일에는 미 공군기 백대가 지원하 러 온다고 발표해 놓고 시가전도 하지 않고 물러난다니 말이 되는가. 임 진왜란때 선조가 맨 먼저 피난하여 민심이 흩어진 것을 잊었는가'.
다른 참모들도 이선근에 동조하자 채병덕은 즉흥적으로 서울사수를 선 언했다. 정부기관과 타군은 서울을 탈출하더라도 육본만은 서울에 남는 다고 결정한 뒤 회의를 끝낸 채병덕은 장도영 정보국장을 통해 김종필중 위를 불렀다. 밀봉한 봉투를 건네주면서 채소장은 '창동선을 방어하고 있는 유재흥 7사단장에게 보이고 답을 듣고오라'는 것이었다. 편지의 요 지는 '창동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지프로 포탄이 떨어지는 수유리를 지나 창동으로 다가가니 대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7사단 병력은 후퇴하고 5사단 병력은 전진하는데 독전대가 나서서 권총을 들이 대면서 위협해도 공포에 질린 패잔병들은 총구를 몸으로 밀어붙이면서 달아나고 있었다. 7사단 사령부가 어디로 갔는지아는 장병도 없었다. 겨 우 사단장 부관을 찾아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것은 후퇴가 아니라 총붕 괴라고 생각한 김종필은 전선을 빠져나오다가 김종갑 7사단 참모장을 만 났다. 그는 '채총장한테 가서 오늘밤도 지탱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라' 고 하는 것이었다. 김종필 중위는 정릉에서 정보국장으로 모셨던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참모학교 부교장이던 이대령은 독전요원으로 나와 있었 다.
그는 '현재상황으로는 내일 아침까지 버티기도 힘들다. 부대를 일단 물려서 재편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김)중위는 돌아와서 채병덕 총장 에게 보고했다. 채 총장은 '담배 펴'하면서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갑을 내미는데 그의 손이 덜덜 떨려 담배개비가 저절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채총장은 한숨을 쉬더니 '수고했어. 가봐'라고 했다. 김종필 중위는 다 시 지하벙커에 있는 작전상황실로 돌아와서 땅바닥에 깔아놓은 5만분의1 지도에 전황을 그려넣고 있었다. 박정희도 이 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채총장은 김종필 중위의 절망적 보고를 들은 직후 오전 11시에 육본 참모와 재경 지휘관 연석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육본을 오늘 시흥보병 학교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철수계획을 김백일 참모부장이 설명하도 록한 뒤 비만체질의 채총장은 의자에 앉은 채 졸기 시작했다. 때때로 심 하게 코를 골았다. 코고는 소리에 스스로 놀라서 깨어났다가 또다시 잠 에 떨어지고 있었다. 공병감 최창식대령이 나서서 육본철수 뒤의 한강다 리폭파 계획을 설명했다. 당시 한강에는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인도 교를 비롯하여 광나루에 있는 광진교, 그리고 복선철교와 두 개의 단선 철교가 걸려 있었다.
그 전날 채병덕 총장은 서울 북방에 있는 많은다리 들이 하나도 폭파되지 않고 결국 의정부가 떨어지자 최 공병감을 불러 한강다리 폭파준비를 지시하면서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총살이다'고 못을 박았다. 한강다리가 폭파될 경우 강북에서 고립될 약 5만의 국군과 수백만 국민들에 대한 고려보다는 폭파가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더 무겁 게 최 대령의 뇌리를 누르고 있었다. 육군본부의 선발대는 낮 12시30분 용산을 떠나 2시에 시흥에 도착했다. 연도는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과 차 량으로 메워져 있었다.
시흥 보병학교에 도착한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중인데 미고문단장 대 리 라이트 대령이 채병덕 총장에게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다. 따라서 육 본은 서울로 복귀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미군의 조언을 무조건 적으로 따르는 편인 채총장은 내리던 짐을 트럭에 다시 싣고 서울로 돌 아왔다.
그날 아침 가족을 데리고 서울을 빠져나온(채병덕 총장도 미리 가족 을 피란시켰다) 신성모 장관은 수원역장실에서 '육본을 시흥으로 옮기고 지구전을 펴라'는 명령서를 작성하여 비서실장을 통해서 채병덕 총장에 게 전달하도록 했다. 채총장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육 본의 귀환과 함께 신문사에서 나온 호외는 '미군이 온다'라고 외치고 있 었다. 피란길에 올랐던 많은 시민들은 집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인민군 주력이 집중된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의 전차대는 저녁 7시 수유리를 통과하여 미아리 고개로 접근했다. 자정을 지나 28일로 접어든 새벽1시 인민군 전차대는 길음교 전방에 눕혀놓은 수십대의 차량 장애물을 간단하게 돌파한 뒤 길음교로 진입했다. 국군측에서 폭파장치를 눌렀다. 도화선은 뱀처럼 몸부림치며 타들어가다가 식어버렸다. 적이 도화선을 중간에서 끊어버린 때문이었다. 8대의 전차대는 그대로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보병의 엄호를 받지 않은 전차대의 돌진이었다.
대담무 쌍하다고 할지 무모하다고 할지. 이 전차대가 창경원, 동대문, 돈암동 등지를 휘돌아다닌다는 보고를 접한 채병덕 총장은 육본의 재철수를 명 령한다. 이미 질서있는 철수가 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아직 인 민군 본대가 서울에들어오기도 전이었지만 단지 8대의 전차가 시내로 들 어왔다는 것이 육군본부 지휘부를 일종의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육본 의 무질서한 심야탈출이 시작되었다. 박정희도 이 행렬에 끼였다. 지향 점은 한강인도교였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