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불운의 계절 -- (26) 박정희의 6·25일기
새벽3시 직후부터 전전선에서 인민군의 남침을 전하는 보고가 육본 정보국 상황실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전면전이란 판단을 한 당직장교 김종필중위는 정보국장 장도영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북괴군이 전전선에서 포격을 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나는 잠 결에 그 이야기를 설핏 듣고 수화기를 놓다가말고 잠이 깨면서 정신이 번쩍 들어 벌떡 일어났다. 김중위에게 전화를 다시 걸어 '포격이 심하 면 유선이 끊어질 염려가 있으니 연락이 두절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 라. 내가 곧 나간다'고 지시했다'(장도영 회고록). 장도영 국장은 육 본의 국장들 가운데 가장 먼저 새벽5시쯤 나왔다.새벽4시 서울역, 6사 단정보참모로 전출되는 전전투정보과장 유양수중령은 전송나온 이영근 중위와 두 명의 장교들에게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정신 차려 근무하 라'고 당부하고 원주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네 시간 뒤 원주 사단본부 에 도착해서야 그는 6사단이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김종필은 육본의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한 뒤, 귀가하여 막 잠에 든 이영근 중위를 비롯한 정보국 장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새벽잠 을 깨웠다.
그는 또 작전국으로 달려가 일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어야 한다'고건의했으나 사령은 '나에겐 그런 권한이 없다'고 했다. 전군 비상령이 내려진 것은 전면 남침 4시간이 지난 뒤였다.
인민군의 남침에 대한 작전을 총지휘해야 할 채병덕육군총참모장 은 24일 밤 육본 장교구락부 준공식 파티에 참가하여 밤늦도록 놀다가 25일 새벽 2시쯤 관사에 돌아왔다. 육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이 관사로 최초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새벽5시10분쯤. 6사단7연대장 임부택중령이었다. 전속 부관 나엄광 중위가 전화를 받았다. 임중령은 '화천지구 전면에 걸쳐 적이 포격을 가해오고 있으니 빨리 총장님에 게 전하라'고 했다. 나중위가 총장 부인 백경화씨를 깨웠고 백씨는 남편을 깨웠으나 채병덕은 잠결에서 '어차피 38도선의 분쟁일 거야' 라고 말한 뒤 다시 잠들어버렸다.
임중령은 그전에 김종오 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간밤의 장교구락부 파티에 참석하러 서울에 가고 사 단에는 없었다. 이날 새벽 대부분의 일선 사단은 파티 참석 등의 사유 로 사단장(수도권 부대에서는 연대장까지)이 영내에 없는 상태에서 공 격을 받았다. 전체 병력의 3분의1 이상이 외출, 또는 농번기 휴가로 나가 있었다. 육본에서는 아무리 총장관사로 전화를 걸어도 바꾸어 주 지않자 일직사령이 달려왔다.
그제야 잠자리에서 일어난 채병덕은 신성모 국방장관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채총장은 장관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거니 '공관에 계시지만 그 분은 일요일에는 전화를 받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습관이 있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채총장은 신중령을 불러 함께 신장관을 찾아갔다. 신장관은 잠옷차림으로 응접실로 나와 지도를 앞에 놓고 채총장의 보고를 청취했다. 이때가 남침 개시 네 시간이 지난 아침7시쯤.
전쟁지휘를 하는 데 있어서 육군총참모장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직책 은 육본작 전국장이었다. 육본에서 김종필 중위는 장창국 작전국장을 찾으려고 했으나 연락이 닿질 않았다. 장대령은 육본 근처의 관사에 살다가 한 일주일 전에 아현동으로 이사를 갔고 아직 전화를 집에 놓 지 못하고 있었다. 육본에선 헌병들을 아현동으로 보냈다. 이날 아침 장대령은 아내와 함께 마포 어시장에 가서 해산물을 사 가지고 왔다고 한다. 한가롭게 집에 있는데 바깥에서 사이렌이 자꾸만 울려대는 것이 었다.
나가보니 헌병차였다. 그 차에 타고 육본으로 달려갔다. 그는 남침 이 시작된 지 일곱 시간이나 지난 오전 10시쯤 육본에 도착했다. 이때 는 벌써 개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다. 남침 시작 7시간이 지나 도록 일선사단과 육군본부의 지휘탑은 술취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있었다.
이날 오전6시30분 서울역 상공에 검은색 야크 전투기가 저공비행 으로 출현했다. 육본 근방의 대공포대에 있던 수도사단8연대 소속 강 영환중위는 50밀리 기관총으로 야크기를 향해서 수십 발을 쏘았다. 야 크기는 한강쪽으로 사라졌다. 한 10분 뒤 육본에서 장교가 튀어나오더 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사격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강중위나 그 나 남침이 시작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육군본부가 전면전이란 결론을 내린 것은 25일 오전9시를 지나서였 다. 연중 계속되던 38선상의 국지전 정도라고 생각하고(또는 그렇게 기대하고) 있던 육본 참모들은 상황실 지도판을 뒤덮기 시작한 붉은 화살표의 남진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오전 10시에 경무대에 들렀을때 이승만 대통령은 경회루 연못으로 낚시를 간 뒤였 다. 10시30분 집무실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신장관이 보고하자 대통령 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텐데···'라고 했다.
이 시간에 김종필 중위는 미래의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한다. 박정 희는 사흘 전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김중위에게 '정신 똑바로 차려 근 무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경찰서로 연락하라'고 못을 박아두었던 것이다. 1975년 6월25일자 일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25년 전의 그날을 적었다.
'1950년6월25일 나는 고향집에서 어머님 제사를 드리고 문상객들과 사랑방에서 담화를 하고 있었다. 12시 조금 지나서 구미읍 경찰서에서 순경 한 사람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왔다. 장도영 대령이 경찰을 통해 보낸 긴급전보였다. '금조미명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목하 전방부대는 적과 교전중. 급히 귀경'이라는 내용이었다.
새벽4시에 38 선에서 전쟁이 벌어졌어도 12시까지 시골 동네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 람이 없었다. 이 동리에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 문이다. 오후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했다. 경부선 상행열 차에 병력을 만재한 군용열차가 계속 북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 일 야간 북행 열차를 탔으나 군병력 전송관계로 도중도중이나 역에서 몇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 열차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 한 것은 27일 오전 7시경이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불안에 싸여 있고 위장을 한 군용차량들이 최대한도로 거리를 질주하 고 서울의 거리에는 살기가 감돌기만 하였다. 용산 육본 벙커내에 있 는 작전상황실에 들어가니 25일 아침부터 밤낮 2주야를 꼬박 새운 작 전국, 정보국 장교들은 잠을 자지 못해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고 질서도 없고 우와좌왕 전화통화로 실내는 장바닥처럼 떠들썩하기만 하 였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