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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으로 사상적 의구심 씻어내
 남행으로 사상적 의구심 씻어내
 
 전재구 중위의 수기는 계속된다.
 
 '뒤는 인민군, 앞은 한강. 진퇴양난 속에서 체념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타났다. '내가 헤엄쳐 건너가서 보트 하나를 구해올테니 그 대신 우리가족 12명을 보호하여 타게 해주세요'. 우리는 지옥에서 구 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청년은 반 시간 후에 보트 하나를 구해 서 저어 왔다.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공포를 쏘아대며 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세번에 걸쳐 그 가족들을 태워보냈다.
 
 마지막으로 우 리 일행이 타고 건너는데 집중 사격이 시작되었다. 머리 위로 총탄이 지나가고 물을 튕겼다. 납작 엎드린 우리는 지금의 국립묘지 쪽에 상 륙했다. 안도와 함께 용기가 되살아난 우리는 사정거리 밖에 있는 강 북의 북괴 전차를 향해 사격을 가해서 울분을 풀었다. 동작동 산에 올라 서울 쪽을 바라보니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남산에서는 아직도 총성이 요란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 그리고 단선철교 하나의 폭파에는 성공했 으나 복선철교는 부분 폭파, 다른 단선철교는 불발이었다. 강북에서 작전중이던 약 5만의 국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지휘 체제가 붕괴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리가 끊어질 때 적의 주공로인 미아리쪽 에서는 인민군 제3, 4사단과 105전차여단에 대항하여 국군 제2, 5, 7 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투입되어 있었다. 개성→문산→서울로 이어지는 적의 조공로에는 적의 1, 6사단에 대항하여 국군1사단이 선 전하고 있었다.
 
 6개 사단 규모의 국군은 적의 전차가 28일 새벽 1시 미아리고개 를 넘어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한 시간 반 뒤에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버리자 뿔뿔이 흩어져 필사적으로 한강을 건너게 된다. 이 도강은 지 휘체제의 작동 없이 이루어진 집단탈출이었다. 국군은 이때 명령체제 가 와해됨으로써 군중으로 바뀌었다.
 
 ▲ 이동식 1사단 연대장 연락장교의 수기: '소대원들을 데리고 한 강하류 이산포에 도착한 것은 28일 밤 11시경이었다. 한강물은 달빛 에 반짝이고 멀리 서울과 김포 하늘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수백명 의 국군이 한강물 속에서 뭉쳐 있었다. 가슴, 목까지 물에 잠긴채 건 너오는 나룻배를 향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 이었다.
 
 장교들도 많았으나 지휘통제는 간데 없고 병사들은 시정잡배들의 오합지중이었다. 나는 저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어 강둑에서 인민군과 싸우다가 죽기로 결심했다. 소대원들에게 '너희들은 먼저 가라'고 한 뒤 숲속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숨겨둔 나룻배를 발견했다.
 
 이런 아수라장 속을 헤매고 있었을 박정희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 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고 있었다. 여 러 번상부로 경고도 올렸다. 그런데도 국군 지휘부는 미군의 말만 안 이하게 믿고 있다가 아무런 대비없이 당한 것이다.
 
 안보를 외국에 맡 겼을 때의 문제점과 무비 유환의 위험성을 이때의 박정희처럼 절감한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된 뒤 그의 소신이 된 자주 국 방과 유비무환은 한강변을 헤메고 다니던 이날 밤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로부터 25년뒤 1975년 6월 25일자 일기장에 박정희 대통 령이 써놓은 감상은 28일 새벽 한강변에서 느꼈던 것과 큰 차이가 없 을 것이다.
 
 '우리는 남침징후를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하 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판단서는 전쟁이 발발한 후 너무나 정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 가 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4백년 전 임진왜 란 때 우리 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 시대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28일 밤 2시쯤 육본이 철수할 때 박정희의 거동에 대한 목격증언 으로서는 전투정보과 소속 육사8기 출신 서정순중위의 그것이 유일하 다. '한강다리가 끊어진 뒤 뚝섬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그 후의 목격담은 정보국 5과장 차호성소령에 의하여 이어진다. 그의 생 전 증언.
 
 '27일 밤에 저는 미아리 전선을 시찰하고 자정이 지나서 육본에 돌아왔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버리고 간 서류와 지도가 널려 있었 어요. 부하 장교들을 데리고 한강다리쪽으로 가 보았더니 폭파된 뒤 였어요. 다리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강에는 추락한 차량들이 수북 이 쌓여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헤엄쳐 서 건넜습니다. 천호동쪽에 도착하니 동이 터 훤해지더군요.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니 '차형! 접니다'하고 불러요. 박정희였습니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의 이야기인 즉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함께 시흥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관악산 근방에서 적의 야크 기가 격추되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박정희는 아직 폭탄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점심 때 누렇고 길죽한 오이를 따 가지고 오는 아주머니를 만나 갖고있는 돈을 주고 한 광주리를 다 샀습니다. 저, 박정희, 부하 세 사람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오이를 다 먹었는데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그날 오후에 박 정희와 헤어졌어요. 그는 시흥으로 가고 저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서 강변에 남았습니다.'.
 
 육군본부는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전했다. 장도영 정보국장 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직후 김백일 육본 참모부장과 함께 작은 보트 를 타고 손바닥을 노 삼아 저어 새벽에 한강을 건넜다. 아침 일찍 보 병학교에 가보니 전투정보과 장교들은 보이지 않았다. 장도영 국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요원들 가운데는 '좌익 전력자' 박정희가 끼여있 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육본은 28일 오후 다시 수원으로 옮겼다.
 
 김종필 중위 일행은 시흥의 임시 육본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갔다. 일제시대에 만든 수원 청년훈련소에 정보국이 들어갔다고 해서 거기로 갔더니 박정희가 정문에 서서 자신들을 맞아주는 것이 아닌 가. 김 중위는 마음이 놓였다. '저분은 역시 북으로 가지 않으셨구나' 하는 안도감. 박정희에게 있어서 6·25남침은 자신에 대한 사상적 의 구심을 해소하는 계기를 선물했다. 그는 이날 한강을 남쪽으로 건너 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11년 뒤 그 한강을 반대방향으로 건너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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