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인도교 폭파때 피난민들 속에…
6·25동란에 대한 우리측의 공간사 '한국전쟁사'(국방부)제1권은 한강다리 폭파 명령이 내려진 것은 6월28일 새벽1시45분이라고 적고 있다.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 미아리 고개에서 달려온 강문봉 대령 으로부터 '적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전화 로 최창식 공병감에게 폭파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최공병감은 즉시 한강인도교로 달려가 이미 폭약을 장치하여 명령만 기다리던 공 병팀에 폭파를 명령하는데 이때가 새벽 2시20분이었다고 한다. 채병 덕 총장이 다리를 지나간 뒤였다. 인도교와 3개의 철교에 장치한 폭 약은 각각 1.6t 정도였다. 최대령은 공병들을 한강 북안으로 보내 다리로 진입하는 차량과 인파를 막으려고 했으나 공포감에 휩싸인 시민과 군인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의 선임장교 김종필 중위는 지하 벙커 상황실에서 바닥에 깔아놓은 지도판을 정리하는 데 정신을 쏟 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썰렁했다. 장교들이 다 빠져나가고 육사 8기 동기생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박정희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앞다투어 도망가는 상황이니 누가 누구에게 알려주고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김중위는 동기생들과 함께 바깥으로 달려나가 병기감 실건물쪽에 남아 있던 트럭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올라 엔진을 걸었 다. 김종필은 서울사범대학교에 재학중일 때 선친이 사준 집을 세놓 아 중고택시를 한 대 사서 굴린 적이 있었다. 운전면허증을 얻어 정 식으로 택시를 몰면서 돈을 꽤 벌어 한때는 본업인 공부보다 부업인 택시사업에 더 재미를 붙인 적도 있었다.
트럭에 탄 인원은 서정순 중위 등 7∼8명이었다. 김종필은 트럭을 몰아 한강인도교로 달렸다. 인파와 차량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인도교에 진입하여 중지도에 도달하였을 때다. 갑자기 꽝하는 폭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한강철교의 아치와 교각이 하늘로 치솟 는 것이었다.
바로 이어서 눈앞의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차량들과 사람들이 하늘로 퉁겨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조금 있으니 옷가지와 사람의 살점들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 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이 폭파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공포의 함성을 지르면서 군중은 오던 길을 돌아 한강의 북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폭파 순간 박정희가 어디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다리 를 건너지 못한 군중속에서 인도교의 폭파를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 다. 김종필 중위보다 약간 뒤에서 폭파장면을 본 것은 육사8기 동기 생으로서 박정희, 김종필과 함께 지하벙커에서 근무하다가 지프를 타고 나온 정보국 전재구(국회의원 역임)중위였다. 그의 수기를 인 용한다.
'조금씩 전진하던 차량과 피란민 대열이 일순간 멈추었다. '왜 안가느냐'고 앞뒤 여기저기서 아우성들이다. 돌연 철교쪽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밤하늘에 섬광이 지나갔다. 철교가 박살났다. 나는 김포반도에 상륙한 적의 6사단이 우리의 후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한강교를 폭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도교 위는 차량과 인파가 범벅이 된 채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꽉 메워져 있었다.
바로 이때 약 1백50m 전방에서 '쾅'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대폭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하더니 수백 수천의 비명소리, 그리고 사람과 차량 들이 풍비박산이 되어 날아가는 것이 수많은 자동차 전조등에 환히 비쳤다. 동시에 앞에서 '와 - '하는 소리. 수천명이 전신에 피를 뒤 집어쓴 채 뒤로 돌진해 나오는 생지옥의 아비규환, 지구상에 다시없는 참극이 연출되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운명도, 국군의 운명도 여기서 끝장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턱대고 마포쪽으로 뛰었다.'.
'한국전쟁사'는 인도교의 폭파로 다리 위에 있던 차량 50대, 사 람 5백-8백 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파와 차량으로 꽉 차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무모함보다도 더 큰 참극이 그때부터 한강 북안에서 빚어지기 시작한다. 김종필 중위 일행은 차를 버리고 서빙고 백사장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가면 강남으로 차량과 달구 지를 실어 나르던 바지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둑을 지나는 데 한 떼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강변을 달려가고 있었다. 기병연대에서 풀려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김종필 중위 일행은 나루터에 도착했다. 고마운 할아버지들을 여기서 만났다. 그들은 '우리야 늙었는데 인민군들이 어떻게 하겠나. 자네들은 일단 피했다 가 다시 올라와야지'라고 말하면서 나룻배를 저어 큰배로 실어다주 었다. 김종필 중위는 28일 오전 10시경까지 국군잔류병과 미고문관 들의 도강을 도운 뒤에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전재구 중위 등 4명은 이날 밤을 일행중의 한 사람인 이하사의 친형집에서 보내고 28일 아침에 서빙고 백사장으로 나갔다.
'한강변 대로에 나가보니 국군이 버리고 간 차량, 중화기, 탄약 등이 무수히 방치되어 있었다. 한강 상류쪽에서 마포 강변까지 수십 만의 피란민들이 운집하여 배를 타려고 혈안이었다. 어제 밤의 비로 강물은 누렇게 불어나 있었고 배는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수영에 능한 사람이 건너가서 작은 보트나 나룻배를 한두 척 가지고 오는 것이 눈에 뜨였다. 고작 5∼6명밖에 탈 수 없는 작은 배에 20∼30 명이 몰려 타고 강변을 떠나는데 20∼30m쯤 가다가 뒤집어지는 것이 었다. 강가로 헤엄쳐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물속에서 서로 붙잡고 엉켜서 다같이 사라진 것이리라. 이런 비극이 눈앞에서 되풀이되었 다. 도강하던 배들중 8∼9할은 이런 식으로 수장되었다. 수천명이 빠져 죽는 것을 4∼5시간이나 지켜보던 우리는 지프의 타이어를 빼 려 하였으나 공구가 없었다. 남산에서는 잔류병과 인민군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 소화기, 중화기 소리가 요란하고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선임자 허준 소령은 남산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빨간 한옥이 내 하숙집이다. 어젯밤 마누라가 해산을 했는데 아들인지 딸 인지도 모르겠다. 뒤는 북괴군 전차요 앞은 한강이니 우리 군인답게 이 자리서 자결을 하는 게 어때?' 허소령의 충혈된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는 말했다. '과장님은 결혼해서 아들딸까지 낳았지 만 저는 아직 총각입니다.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군인이 왜 자살합니까. 도강못하면 저 남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죽읍시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