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끌어안고 기총소사 피해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기대도 무너졌다. 트루 만 미국 대통령은 미조리주의 고향마을에서 주말을 보내다가 남침소 식을 듣자마자 미군 파병을 결심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지도상 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서 트루만이 이런 결심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여순14연대 반란사 건과 같은 지하공작이 아니라 38선을 돌파하는 전면전으로 나온 북 한의 철면피성이 미국 대통령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해석도 있 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28일 미군 공군기가 처음으로 출격하여 인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6월29일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노량 진 쪽의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다가 참호 속에 있는 한국군 병사를 발 견하고 물었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속에 있을 셈인가?' '각하도 군인이고 저도 군인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삽니다. 상관의 철수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제가 여기서 죽을 때까지 이 곳을 지키겠습니다.'.
감격한 맥아더 원수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말했다고 한다(당 시 그를 안내했던 김종갑장군 증언).
'내가 도쿄로 돌아가 지원병력을 보내줄테니 안심하고 싸우게.'.
6·25동란에서 김일성의 3대 실수는 남로당의 봉기를 기대한 것 과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 그리고 서울을 점령 한 뒤 3일간 머뭇거리면서 한강을 건너지 않은 것이다. 당시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의 남침계획 초안은 소련군 사고문단이 만들어준 것인데 서울 점령까지의 작전계획만 되어 있었 다는 것이다.
서울만 점령하면 후방에서는 남로당이 들고 일어나 이 승만 정부는 자동적으로 와해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점령이후의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인민군이 서울을 통과하여 곧 바로 남진했더라면 국군은 재편성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붕괴되 어 버리고 미군이 상륙해도 교두보를 만들수 없었을지 모른다.
많은 국민들은 피란의 길을 선택하여 국군과 함께 남하하기 시작 했다. 6·25직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초법적인 방법으로 단행한 농지 개혁으로 거의 모든 농민들이 '지킬 재산을 가진' 지주가 되었기 때 문에 인민군이 내건 '농지무상분배'나 '계급해방'이란 구호도 매력 을 상실했다.
여순14연대 반란 사건 이후에 있었던 군내 남로당원들 의 숙청과 서울 함락 이후 후방에 불어닥친, 남로당 전력자 모임인 보도연맹원 숙청은 인민군의 남진에 호응할 조직을 원천적으로 제거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군인들을 고무시킨 것은 미군의 참전이었다. 세계최강의 군대가 참전했으니 언젠가는 이긴다는 희망을 갖게되고 '후퇴는 있지만 항복은 없다'는 투지를 샘솟게 했다.
김일성의 3대 실수에 대해서 대한민국을 도운 3대 기적이 있었다. 6월28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7월1일 전차대를 도강시켜 3일 수원을 점령할 때까지의 6일간 한강남쪽 방어선을 지켜낸 것이 첫째 기적이었다. 나머지 두 개의 기적은 8월에 낙동강 교두보를 지켜낸 것과 9월의 인천상륙작전이다.
국군은 28일 중국군(장개석군)의 소 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 명했다. 김사령관은 한강을 건너온 장병들을 수습하여 혼성5개 사단 으로 재편성하여 김포∼서울 사이 한강남안방어선에 투입했다. 중화 기는 서울에 버려두고 온 탓으로 연대당 공용화기는 박격포가 2 ∼ 3문, 기관총이 5 ∼ 6정에 불과한사실상의 소총부대였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까지 사병 신분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육 사는 1949년에 4년제로 개편하고 정규1기생(통산9기)으로 2백63명을 선발하였다. 교관요원이 부족하고 교과과정에 대한 준비가 안되어 있어 1기생에 한하여서는 1년제로 하기로 했다. 1950년 6월1일에 입 교한 정규2기생(통산10기) 3백34명부터 4년제 교육을 시키키로 한 것이다.
약 6백 명에 달한 이들은남침 직후 생도대대로 편성되어 미아리 와 태릉전선에서 격전중 흩어졌다가 한강 남쪽에서 재편성되었다. 이 생도대대의 전사, 실종자는 1백5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정규2기생들은 입교한 지 한달 도 되지 않아 총도 제대로 다룰 줄 몰랐다.
육군소령으로 복직한 박정희는 한강방어선 공방전 동안 수원의 한 국민학교에 들어간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전황판을 복원했다.교 실 벽에 걸린 지도를 떼내어 눕혀 놓고서 박정희는 주로 기억에 의 존하여 서울철수 직전에 종합된 적정을 붉은 색연필로 그려넣기 시작했다.
김종필, 이영근 등 육사8기출신 장교들은 1년이 넘게 박정 희의 지도하에 인민군 사단의 병력, 화기, 편제에 대해서 씨름하다 가 보니 각자의 머리에 관련 정보가 많이 입력되어 있었다. 박정희 는 이들 장교의 머리속에 있는 정보를 뽑아내어 상황판의 복원에 성 공했다. 그 16년 뒤 이영근은 반공연맹의 사무총장으로서 승공관 기 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전시관에 걸린 6·25남침도를 바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봐 이총장, 이거 잘못 됐어. 105전차여단은 여기가 아니고 여 기에 있었어.'.
지도상으로는 불과 몇cm의 오차였고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을 정도였지만 박정희의 뇌리에 남은 서울진입 선 봉부대의 전투배치도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육군본부는 한강을 도하한 인민군 주력이 밀고들어오자 7월3일 오산을 거쳐 평택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육본의 차량행렬이 오산을 지났을 때 북한 공군 야크기 편대의 공습을 받았다. 차를 도로상에 세우고 탑승자들은 길가 수로에 뛰어들어가 몸을 숨기려 했다.
김종필 중위는 수로에 몸을 잠그고 야크기의 기총소사 소리를 들으면서 박정희 소령을 바라보았다. 박정희는 굵은 가로수를 끌어안고서 요리조리돌면서 야크기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이때 미군 전투기 편대가 나타나 야크기 한 대를 격추시키자 나머지는 북쪽으로 달아나고 미군기는 추격해갔다. 육본 차량 행렬이 평택역에 도착했을 때 다시 야크기의 공습을 받았다. 육본은 이날 수원이 적에 점령되자 다음날 대전으로 이동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