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영 적극 건의… 다시 소령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은 6월28일 오후 이동하는 육군본부를 따라 시흥 보 병학교에서 수원의 한 국민학교 건물로 옮겼다. 육본은 수원농업시험장 으로 가서 작전지휘본부를 설치했다. 전투정보과는 과장이 공석인 상태 에서 비공식문관 박정희가 지휘하여 업무체제를 갖추었다. 30일 오전 이곳에 들른 장도영은 27일 밤 육본이 철수할 때 헤어졌던 박정희가 서 울에 남지 않고 도강한 것을 확인하고는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28일 새벽에 적군이 서울에 진입한 상황으로 보아서 그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확실한 근거도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 저렇게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하고 생각 했다. 나는 이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을 버렸다. 오히려 과거 그 를 조금이나마 달리 생각해 왔다는 것이 미안하다는 마음이었다.'.
전투정보과 북한반 선임장교이던 김종필 중위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 희는 수원에서 소령으로 복직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좀 계면쩍은 표정 으로 김 중위에게 '나 복직했다'고 말했다. 난리통이라 새 철모나 계급 장이 없었다. 김 중위는 다른 사람이 쓰던 헌 철모 하나를 주워왔다.상 황판 정리용 색연필로 철모에 빨간 태극 문양이 든 소령 계급 표시를 그려넣었다. 김 중위는 '우선 이걸 쓰시지요'라면서 철모를 미래의 처 삼촌에게 씌웠다. 김종필 총리서리는 '그분의 표정이 그렇게 유쾌한 편 은 아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고 기억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파면된 이후 1년2개월만에 박정희는 다시 군복을 입게 되었다.
인민군의 남침이 박정희를 구한 셈이다.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이 박 정희를 살려내 자신의 적수로 만든 것이다. 박정희를 소령으로 복직시 킨 데는 장도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도영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새벽에 책상 위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살펴보니 상황실 저쪽편에 몇몇 당직하는 장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박정희 문관도 끼여있는 것 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낡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근무에 열중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문득 '그를 계속 문관으로 둘 것인가. 장교가 심히 부족한데 그를 현역으로 복직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장도영 국장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후임으로 막 임명된 정일권에 게 박정희를 복직시켜 달라고 건의했다. 정일권은 '쓸데 없는 말이 나 오지않을까' 하고 난색을 보였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서울이 함락될때 취한 행동을 설명해주었다. 정일권은 '그러면 잘 생각해 보자'고 했다. 며칠후 다시 건의하자 정일권 총장은 장도영을 데리고 신성모 국방장관 을 찾아가 보고를 했다. 신 장관은 즉석에서 승낙하여 인사발령을 냈다 고 한다. 박정희는 정식 발령이 나기 전에 장도영 대령으로부터 내락을 받고 계급장을 먼저 단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필 중위는 박정희에게 철모를 씌워주면서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고 한다. 1949년5월 육사8기로 졸업한 뒤 전투정보과에 배치된 김종필 등 15명의 신임 소위들이 유양수 과장에게 신고를 하니 유 소령은 박정희한테도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작은방에 앉아 있는 작 은 사람이 일어나더니 '나한테는 신고할 것 없어요'라고 인사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군인이 아닌데…'하는 자격지심의 발로였 다. 김종필 총리서리는 최근 기자에게 '나는 당을 많이 만든 사람인데 그때는 대한음주당을 만들었다'고 했다.
육사8기 출신 장교들이 술 좋 아하는 박정희를 당수로 삼아 거의 매일 막걸리를 마시러 다녔다. 당원 의 자격은 큰 양재기에 막걸리를 담아놓고 입을 떼지 않고 단숨에 들이 킬수 있는 주량이었다. 당원의 등급은 주량과 태도에 따라 주신, 주성, 주호, 주걸, 주객으로 나누었다. 당수는 주신과 주성급이라야 하고 어 디를 가든지 술값을 부담하고 여자를 건드려는 안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박정희는 '아이구 나는 당수 자격이 없어. 주호만 하겠다'고 사양했다. 실제로 술값은 김종필 등 8기 장교들이 부담했다. 박정희는 거의 열살이나 아래인 청년장교들과 술을 마실 때면 일본어로 '부레이코'라 고 외치면서 예절이나 형식을 집어치우고 마음 편히 신나게 놀도록 유 도하곤 했다. 박정희는 관사로 8기생들을 초청하여 점심을 자주 대접했 는데 이현란이 내오는 것은 항상 국수였다. 김종필이 어느날 관사에 갔 더니 이현란은 떠나버리고 박정희만 혼자서 덩그렇게 앉아 있었다.
김 종필도 서울사대 3학년 재학중 이화여대생과 사귀다가 실연하여 그 충 격을 잊기 위해서 13연대에 사병으로 지원입대했다가 구타를 견디지 못 하고 탈영한 전력이 있었다. 그는 탈영병 생활을 몇 달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육사교도대에 졸병으로 입대했다. 여기서 행정처장의 당번병으로 근무하다가 육사8기로 들어갔던 것이다.
6·25를 전후한 시기의 음지와 양지를 거치면서 박정희-김종필은 끈 끈한 정과 존경심으로 맺어진다. 두 인물의 특별한 인연은 한국 현대사 의 흥미 있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두 사람은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 다. 부끄럼 타고 내성적이며 강인하고 규격적인 박정희에 대하여 김종 필은 다정다감하고 다재다능하며 명랑하고 낭만적이었다. 박정희의 강 과 김종필의 유는 때로는 어울리고 때로는 부딪치면서 역사의 화폭에 극적인 음영을 그리게 된다.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온 6월28일 북한의 박헌영 부수상 겸 외상은 방송연설을 했다.
'이와 같은 엄숙한 시기에 왜 남조선 인민들은 모두 떨치고 일어나 지 않고 있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모든 인민들은 하나같이 일어나 전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선동에 호응하여 봉기한 남로당원은 아무도 없었다. 국군은 기습 으로 밀렸지만 항복을 거부하고 도강을 선택했다. 비겁한 기습을 당했 다는 데 대한 분노와 점령된 서울에서 들려오는 학살소식은 국군들의 마음에 투지와 복수심을 심었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