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범 후배가 육영수 소개
1950년8월 전투정보과장 박정희 소령은 좁아지고 있는 부산-낙동강 교두보의 상황지도를 매일 아침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교두보는 마산- 상주-영덕-부산을 잇는 사각형 지역으로 쪼그러들고 있었다. 눈덩이를 손아귀에 쥐고 힘을 주면 작아지지만 단단하게 변하듯이 이 교두보는 강화되고 있었다.
이 교두보의 동면과 남면은 바다이고 서쪽에는 낙동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대구-포항의 북방전선이 주방어선이 되었다. 인민군이 먼저 이 방어선을 돌파하여 부산을 점령하느냐, 그 전에 유엔군이 병력 과 물자를 충분히 투입하여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가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남한의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다. 북 한측은 약47만명을 이 점령지에서 동원하여 전선으로 보냈다.6만∼12만 명은 군인으로, 나머지는 노무자로 부렸다. 8, 9월의 대공세 때 인민군 의 약 3분의 1은 남한출신이었다.
국군은 교두보 지역의 가두에서 지나 가는 청년들을 징모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보충했다. 대구와 부산에 있 던 두 개의 보충병 훈련소에선 이들 청년을 받아서 열흘간 훈련을 시킨 다음 하루에 1천5백명을 전선으로 보냈다. 부산에 설치된 육군종합학교 도 단기교육으로 매주 2백50명씩의 장교들을 배출하여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8월16일 오전 일본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군 B-29폭격기 98대는 왜관의 낙동강 서안 인민군 집결지구로 추정되는 곳에 약30분간 9백t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이때는 이미 인민군의 주력이 도하한 뒤로서 큰성 과는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민군 3, 13, 15사단은 Y자 모양의 삼 거리에 위치한 다부동을 탈취하려고 했다. 이곳은 왜관과 군위쪽에서 오는길이 만나 대구로 빠지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공격자로서는 분진합 격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백선엽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이 미 25사단과 국군 8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씩을 지원받아 방어하는 이곳에 대한 적의 일제공격은 18일부터 시작되었다.
인민군은 청진으로부터 열 차편에 실어온 21대의 전차를 투입했다. 21일 대구시내에 포탄이 떨어 졌다. 국방부와 내무부를 제외한 행정부와 국회는 며칠 뒤 부산으로 옮 겨갔다. 경북도청에서는 시민들에게 피란을 권고하기도 했다. 일선의 군인들은 등뒤에서 일어나는 사태로 사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군은 정부에 대해 피란을 중지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8월21일 새벽 백선엽 1사단장은 적의 15사단이 영천전선으로 빠진 틈을 이용하여 반격에 나섰다가 적 11사단의 즉각적인 재반격을 받았다. 11연대 1대대가 고지에서 후퇴하자 인접한 미 25사단 27연대장 마이켈 리스대령(뒤에 주한미군사령관)은 '우리 측면이 노출되었으니 우리도 후퇴하겠다'고 백(백) 사단장에게 통보했다. 백선엽은 사단본부에서 일 선으로 달려갔다. 대대원들은 총을 거꾸로 메고 후퇴하고 있었다. 이들 은 밤낮으로 싸운 데다가 물과 밥 공급을 2일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사단장은 대대원들의 앞을 막고 나섰다. 그들을 앉힌 다음 이렇게 역설 했다.
'조국의 흥망이 여기에 걸려 있는데 어디로 후퇴할 것인가. 우리가 갈 곳이라곤 바다뿐이다. 지금부터 내가 앞장 선다. 만약 내가 물러나 면 나를 쏴라. 그 대신 귀관들이 명령 없이 물러나면 내가 쏘겠다'.
백선엽 사단장은 대대의 앞장을 섰다. 패잔병 같던 대대원들이 사 단장이 앞장서자 갑자기 흥분상태로 들어가 잃었던 448고지를 탈환했다. '한국전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최근 기자에게 '지휘관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부하에게 강요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21 ∼23일 사이 인민 군은 일곱 차례의 야간공격을 가해왔다. 다부동 전투는 이제 '한국의 베르당 결전'으로 변하고 있었다. 1사단은 이 전투에서 56명의 장교들 을 비롯하여 2천2백34명의 전사상자를 냈고 인민군은 5천6백90명이 전 사했다.
육본을 따라 박정희 소령이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다니고 있던 시기 정보국 보급실장 김재춘(중앙정보부장 역임)소령은 육사5기생도 시절중 대장이었던 박 소령을 스승처럼 모시고 다녔다. 박정희는 일곱 살이나 아래인 김재춘에게 '김형'이라고 했다. 김 소령이 '제자 보고 뭘 그러 십니까'라고 하면 박정희는 '임자'로 바꿔 부르곤 했다. 김재춘은 박정 희가 그 난리통에도 헤어진 이현란을 못잊어 하고 있음을 알고 '제발단 념하시고 장가 드십시오'라고 말하곤 했다.
이 무렵 박정희의 대구사범 한 회 후배인 송재천이 찾아왔다. 그는 충북 옥천 농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 교육을 받고 배속장교가 되었는 데 6·25가 터지자 소집영장이 날아왔다.그는 선배인 박정희를 만나러 갔다. 박정희는 졸업하고 처음 보는 후배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전투정 보과에서 포로신문관으로 일하도록 해주었다. 8월 어느 날 송 소위는 박정희에게 말을 건넨다.
'과장님 왜 혼자 사십니까. 가족이 있어야 마음도 든든하고 위로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좋은 색시가 있어야지'.
송 소위는 외가쪽으로 동생뻘 되는 육영수란 색시를 소개했다. 스 물여섯이라고 했다.
'제가 보기에는 만점인데 과장님이 보시면 만점이 될지, 영점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그런 색시가 있느냐'하는 정도였다. 며칠 뒤 송 소 위는 다시 육영수 이야기를 꺼냈다. 박정희는 '그럼 한번 만나 보기나 할까'라고하는 것이었다. 송재천 소위는 그 길로 부산 영도에서 셋방을 얻어 피란생활을 하고 있던 이모 이경령을 찾아갔다.
'이모님, 마땅한 자리가 있는데 영수 누이 출가안시키시겠어요?' '글쎄, 어떤 사람인데'.
'제가 모시는 상관입니다. 인품이 그만입니다' '성씨는?'.
'고령 박씨지요' '그렇게 좋은 사람인가'.
'청렴하고 강직하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