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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과 장교는 일선투입 안된다'
 '정보과 장교는 일선투입 안된다'
 
 6·25남침 때 일선 소대장, 중대장으로 배치되었던 육사8기 장교들 가운데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육사8기생은 졸업생이 1천3백45명으 로서 역대 최다인데 6·25중의 전사자가 4백19명으로 31%이다. 대부분 의 전사자는 보병특기자들(8백85명) 중에서 나왔는데 전사율이 40%를 넘는다. 인민군은 1등 저격수를 선발하여 국군의 소대장을 표적으로 삼도록 했다.
 
 '8기생은 소모품'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전사에 8기 생이 유공자로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은 그들이 말단 지휘자들이 었으므로 단독 작전을 수행할 입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8기 생은 중령 계급장을 6년 이상 달아야 할 정도로 진급에서도 불이익을 보았다. 이런저런 울분에 차 있던 이들은 5·16거사의 주체세력이 된 뒤에는 우리나라의 중추부를 장악했다. 그 인맥의 마지막 주자가 김종 필 총리서리인 셈이다.
 
 7월3일과 4일 박정희 일행은 육본과 함께 수원을 떠나 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가면서 북상하는 미군 선발대를 만났다. 이들은 일본에 주둔 하던 미24사단 21연대 1대대 장병 4백6명으로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인민군을 장개석 군대 정도로 만만하게 보고 소련제 T-34 전차에는 통하지 않는 무반동포나 바주카포를 가지고 소풍가는 기분으 로 올라가던 스미스 부대는 7월5일 오산 북쪽에서 인민군 4사단 전차 부대의 공격을 받고 괴멸해버렸다.
 
 육본은 7월4일 대전에 있던 충남도 청에 들어갔다. 도청 발코니에서 장도영 정보국장은 미24사단의 전차 부대가 북상하는 것을 보고서 '이제는 안심이다'고 생각했다. 미군은 인민군을 금강선에서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금강을 넘은 인민군 은 20일 대전을 점령했다. 21일 새벽 후퇴중에 길을 잃은 24사단장 딘 소장은 혼자서 35일간 헤매고 다니다가 8월25일 좌익청년들에게 붙들 려 북한측에 넘겨졌다.
 
 미군은 마침내 북한 인민군이 남미나 필리핀 군대같은 오합지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뒤의 일이지만, 미 국은 일본군, 북한군, 중공군, 월맹군 같은 유교문화권의 군대는 인간 관계와 상하간 서열의식이 강한데다가 정치적 이념으로 무장하면 역경 에 처해서도 악착같이 싸운다는 것을, 1승(태평양전쟁)1무(6·25동란) 1패(월남전)의 기록을 통해서 깨닫는다. 그들은 역사와 문화가 서구와 너무 다른 동아시아에서 육상전에 말려들어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박정희는 7월11일 대전을 철수하는 육본을 따라서 김천에 가서 3일 간 머물다가 14일 대구에 도착했다. 경북도립병원 앞에 있는 건물에 입주했다. 인구 30만 명이던 대구는 피란민이 몰려들어 70만 명으로 불었다. 8월에 접어들면 대구 북쪽으로 10km까지 남하한 전선에서 대 포소리가 들려오고 밤에는 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했다. 박정희 소 령이 이끄는 전투정보과의 주임무는 낙동강 교두보를 압박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들에 대한 전력조성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 군에 서 '전투서열'(Order of Battle)이라고 번역하는 개념이다. 우군이 상 대하고 있는 적부대의 역사, 지휘관들의 성격, 장비, 편성, 사기 등에 관한 정보를 항상 최신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정보개념은 6·25 를 통해서 한국군에 소개되었다. 미군은 전투정보과에 정보장교를 파 견하여 적 부대의 전력조성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가지고 갔다. 낙동 강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국군은 육본의 참모장교들까지 뽑아가서 일선에 투입하곤 했다. 박정희는 이런 조치에 맞서서 전투정보과 소속 장교들을 잘 보호하여 한 사람도 일선으로 뽑혀 가지 않도록 했다.
 
 어느날 육본 정보국 첩보과 장교 및 하사관 비상소집이 있었다. 집 합한 수십 명의 장병들은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이들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미군 수송기에 실려진 장병들은 낙하산을 하 나씩 짊어지고 즉석 낙하요령을 교육받았다. 비행기는 낙동강 전선 후 방의 점령지 상공에 도달했다. 장병들은 뛰어내렸다. 미군은 겁을 먹 은 사람들을 비행기 밖으로 밀어버리기도 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 란 '살아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4명의 실종자를 제외한 최정국 중위 등 대부분의 장병들이 피란민 으로 가장하여 생환했다. 생환과정에서 보고 들은 적정이 좋은 정보보 고서가 된 것이다.
 
 정보국 산하에 있긴 했지만 독립부대처럼 행동하던 방첩부대에서도 그런 목적의 비상소집이 있었다. 집합한 장교들을 둘러보던 부대장 한 웅진 중령은 앞에 있는 장경순(국회부의장 역임) 소령을 보더니 화를 버럭내면서 '장 소령, 자네는 내 방에 가서 대기해!'라고 소리쳤다.
 
 장교들을 비행장으로 보낸 뒤 사무실로 돌아온 한(한) 중령은 영문을 모 르는 장경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전북이 고향인 두 사람은 군에 들어오기 전부터 친구 사이였다. 육사동기 박정희를 형님으로 모 시면서 그가 불우할 때도 의리를 변치 않았던 한 중령은 이때 대구지 역의 저승사자였다. 낙동강 전선과 후방의 방첩을 책임진 한웅진의 부 대는 간첩과 좌익 색출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대구폭동의 예에서 보듯 좌익세력이 뿌리깊은 이 지방에서는 수많은 용의자들이 재판 없이 처 리되었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 한웅진과 후임 부대장 김창 룡 중령이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던 1950년 여름의 대구시절, 박정희 는 한웅진, 장경순과 자주 어울렸다. 한웅진은 술에 취하면 짖궂은 장 난을 잘 쳤다. 박정희의 군화에다가 소변을 누기도 했다. 그것도 모르 고 발을 넣다가 오줌물이 쭉 솟아오르면 박정희는 '이 친구가 또 지랄 했구나'하고 웃기만 했다. 박, 한, 장 이 세 사람의 인연은 그 11년뒤 박정희 소장이 신당동 집을 나와서 군사혁명의 지휘본부로 출발할 때 동행하는 운명으로 발전한다.
 
 8월 말 인민군이 마지막 힘을 내어 대구 북쪽을 공격하고 있을 때 박정희 소령의 과에는 인민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 중좌가 이영 근 중위와 침식을 함께 하면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정 중좌는 8월22 일 다부동 전선에서 당번병 한 명을 데리고 백기를 흔들면서 귀순했다. 그는 허리에 찬 가죽가방에 작전지도를 넣어왔다.
 
 '한국전쟁사'에 따 르면 그는 정치군관들의 간섭에 대한 불만과 함께 사단장이 포병사격 의 문제를 추궁하는 데 대하여 위험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국군1사단 에 인민군이 과수원에 위장시켜 놓은 20문의 포 위치를 알려줬다. 이 포들은 즉시 파괴되었다. 이영근 중위는 정봉욱의 머리에 남아 있는 정보들을 빼내 책 한 권 분량의 '적 전투서열 정보'를 작성하여 미군 과 국군 지휘부에 제출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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