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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반란 우려 남로당전력자 숙청
 내부반란 우려 남로당전력자 숙청
 
 국군은 기습을 받아 서울을 3일만에 내주었지만 '질서있는 후퇴'를 했다.
 
 한강에서 낙동강까지 밀리는 데 한 달을 끌었다. 국군이 싸우면서 후퇴하는 동안 미군은 부산-낙동강 교두보를 강화하여 반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전투정보과장 시절 6·26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던 유양수 중령은 6사단 정보참모였다. 그는 후퇴를 하면서도 전쟁에서 지겠다는 생각이 한번도 들지 않더라고 했다.
 
 '정의는 우리 편이라는 생각과 우리의 가족과 땅을 지킨다는 의무 감이 그런 확신을 준 것 같습니다.'.
 
 인민군 창설작업에 참여했다가 공산주의의 본질에 절망하고 월남하 여 국군에 들어갔던 방원철 소령(당시)은 국군이 뜻밖의 장점을 가진 것을 발견했다.
 
 '인민군은 부대가 와해되면 어쩔 줄 모르고 흩어져 있다가 포로가 되는데 국군은 그럴 경우 스스로 인접 부대를 찾아가서 또 싸우곤 합 디다. 무질서하게 보이던 남한 군대의 자율성과 질서있는 북한 군대의 비능률성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항복을 거부하고 질서있는 후퇴를 했 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은 도처에서 항복하면서 붕괴하여 우리 는 한달만에 압록강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대한민국은 붕괴를 막기 위하여 국가로서의 무 자비한 생존본능을 발동시켰다. 내부 반란을 막기 위해 경찰이 관리하던 '남로당 전력자' 보도연맹원들을 숙청했고 후퇴를 막기 위해서 분대장까지 즉결 처분권 을 행사토록 한 것이다. 우리 육군은 전사자료로 비치하기 위하여 참 전군인들의 증언록을 많이 축적하고 있다. 1966년 육군방첩부대 준위 방맹송을 인터뷰한 기록에 이런 증언이 나온다. 6·25때 방 준위는 방 첩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문:후퇴하고 북진하면서 보도연맹이라든지 적의 악질분자를 처단 하지 않았습니까.
 
 답:서울에 괴뢰군들이 들어오니까 보도연맹원들이 상당히 나서서 대대적인 환영을 했다고 하니까 수원에서부터 보도연맹원을 없애야 하 겠다, 이렇게 되었는데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악질적인 놈은 죽을 때도 괴뢰군 만세라고 하고, 또 죽을 때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꺼번에 40∼50명, 수원에서 20 여명…. 그때 김창룡 중령한테는 빨자만 들어가도 통하지 않으니까요.'.
 
 수도사단 8연대 소속 강영환 중위는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날 광나 루를 통해서 한강을 넘었는데 도중에 작대기를 들고 국군 낙오병들을 잡으러 나온 보도연맹원들의 추격을 받았다. 수원에 몰린 국군에게는 벌써 서울에서 자행되고 있던 경찰-군인가족과 우익인사 학살사건이 전해지고 있었다. 비겁한 기습을 당해 쫓기는 신세가 된 국군에게 이 런 소식은 치를 떨게하는 것이었다. 즉시 방첩부대와 경찰 계통으로 보도연맹원 처리 지침이 내려갔다.
 
 이 무렵 야간에 충북의 진천을 후 퇴하던 국군부대는 마을 창고에서 들려오는 '인민군 만세!' 소리를 듣 게 되었다. 창고에 갇힌 보도연맹원들이 국군의 접근을 인민군의 접근 으로 오인하고 그런 것이었다. 화가 치민국군들은 수류탄을 까 창고속 으로 던져 넣었다. 후퇴과정에서는 그런 살벌한 일들만 생긴 것은 아 니었다. 수도사단 강영환 중위는 육사 8기생회가 펴낸 '노병들의 증언' 에서 이런 이야기를 공개했다.
 
 '용인에서 오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7월4일 밤. 며칠 간 악전고투하면서 잠도 못자고 식사도 못해 기진맥진했다. 출발과 함 께 졸면서 앞에서 가는대로 발길만 옮겼다. 옆이나 앞뒤에서 누가 가 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자정쯤인데 눈을 떠보니 옆에서 누런 견장 을 붙인 북괴병들과 우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오월동주였다. 그들도 휴식을 하다가 어느 사이 우리 대열에 끼여든 모양이었다.
 
 잠에 취해서 적이란 생각도 못하고 경계심도, 긴장감도 들지 않았다. 그 들이 앞뒤로 얼마나 있는지조차 확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을 감 고 정신없이 걸었다. 잠이 그다지도 야속할까. (중략). 청주, 보은,점 촌, 의성 전투를 거치고 청송전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야간강행군을 실 시했다. 휴식명령이 떨어지면 병사들은 길가에 앉아버린다. 자정쯤인 데 앉으면서 보니 북괴병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 병사들은 슬금슬금 걸어다니며 앉을 자리를 찾고 있다.
 
 지칠대로 지쳐서 피아간에 전투란 말이 떨어지지 않으면 긴장도 적개심도 발동하지 않는 모양이다. 서로 잡거나 총을 쏘면 끔찍한 살상 극이 벌어졌을텐데 그들은 떠나가고 우리는 그 자리에 앉으며 눈을 감는다.(중략). 영천시내 어느 교회에서 우리 중대가 잠을 자고 있는데 북괴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았다. 중대원들이 빠져나와 대구로 통하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내가 맨 앞에 서서 부대를 인솔하여 다리 위에 들어섰다. 아직 새벽이 오기전의 어둠속이었다. 우리 앞에서 한 부대 가 걸어가는데 북괴의 행군부대였다.
 
 이제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교량끝에 가까이 가니 북괴군 장교가서 있었고, 양쪽에는 기관총을 거총하고 사수들이 엎드려서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북괴군 장교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 앞에서 걷고 있는 인민군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야, 너 이 새끼들 왜 지금 오나?'. 그의 눈앞에서 피아가 순간적으로 뒤섞여버렸으니 그도 기가 찰 노릇이 었다. 인민군은 오른쪽으로, 우리는 왼쪽 제방으로 갈렸다. 그들은 우리를 등 뒤에서 공격하지는 않았다.'.
 
 소대장-중대장으로서 인민군 남침을 정면에서 받아야 했던 육사8기 출신 장교들은 후퇴하다가 상관으로부터 즉결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노병들의 증언 육사8기사'는 8사단 10연대장 고근홍 대령에 대한 저 주섞인 특집기사를 싣고 있다. 8사단 10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의 김 천만 소대장은 충북 구합리 전투에서 대대가 전멸하는 가운데 혼자서 후방으로 이탈하다가 고 연대장과 맞닥뜨렸다. 적전도망이라며 헌병에 게 총살명령을 내리는 연대장에게 김 중위는 이렇게 항변했다는 것이 다.
 
 '대대가 전멸했는데 어떻게 단독으로 싸웁니까. 연대장께서는 안전 한 후방에서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죽게 해 주 십시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수수밭으로 뛰어들어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 며칠 뒤인 7월10일 단양 전투에서 작전상 후퇴를 하던 같 은 연대의 중대장 정구정 중위도 고근홍 연대장이 쏜 총탄으로 즉결처 분되었다. 정 중위는 유언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다고 한다.고 연대장은 8월에는 다부동 결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북진중 전사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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