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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아버지 몰래 약혼식 올려
 육영수, 아버지 몰래 약혼식 올려
 
 영천을 남쪽으로 벗어나면 들판이 열려 있고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 어진 뒤에 약12㎞ 지점에서 높이 70∼80m 정도의 언덕길이 꾸불거린다. 경주로 넘어가는 아화고개. 유재흥 2군단장이 지휘하는 8사단과 4개 증원연대와 1개 대대는 10일 경주로 향하던 인민군 15사단이 이 고개 에 나타나자 반격을 개시했다. 13일까지 계속된 반격전으로 국군은 영 천을 탈환하고 15사단을 궤멸시켰다. 낙동강 교두보를 위협한 최후의 공세는 저지되었다. 다부동 방어전을 치러내고 대구 북동쪽 팔공산 전 선으로 옮겼던 1사단의 백선엽 준장도 인민군의 힘이 빠지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9월의 한나절 햇볕처럼 공세의 열기는 지속성이 약했 다. 영천전선에 가보았더니 인민군 전차들이 기름이 없어 유기된 것을 보았다. 백 사단장은 며칠 뒤 미8군으로부터 '공세로의 이전'에 대한 준비명령을 받았다. 인천상륙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일선에 퍼지면서 장병들의 사기가 올랐다. KO를 노린 인민군의 9월 공세는 빗나갔고,이 제는 카운터 블로를 기다려야 하는 입장으로 돌고 있었다.
 
 9월15일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2백61척의 대함대가 미해병1사단 과 육군7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7만5천 명의 병력을 싣고 인천상륙작전 을 벌였다. 다음날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를 탈환했다. 인천지역 주 둔 인민군 2천명은 거의 전멸했다.
 
 미군의 전사자는 20명.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 사령부가 발표하기 수 시간 전 AP통신 서울특파원 신화봉 기자에 의해서 정일권 총참모장이 발표하는 식으로 특종보도되었다. 6·25남침은 UP통신 서울특파원 잭 제임즈 기자가 특종하여 퓰 리처상을 받았다.
 
 워커 미8군사령관은 16일 오전 9시를 기해서 유엔군에 총반격 명령 을 내렸다. 미제1군단이 주공부대로서 대구-김천-대전-수원으로 진격 하도록 했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미1기 병사단, 24사단, 영국27여단과 함께 미1군단에 배속되었다. 국군1사단 이 19일 다부동을 재탈환했을 때 백선엽은 지옥을 보았다.
 
 인민군이 버리고 간 전차, 중화기, 탄약, 그리고 시체들은 고지를 뒤덮고 있는 데 말과 소의 사체와 뒤섞여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인민군 지휘부는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한 사실을 병사들에게 비밀로 하고 모든 기관총 사수들의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 실탄을 다 쏘고 죽도록 했다.
 
 탄피무더기에 하체가 파묻힌 사수들의 시체들이 많았다. 백선엽은 북진작전 의 초장에 속시원한 복수를 했다. 인민군 1사단은 6월25일 새벽 개성- 문산을 지키던 백선엽의 1사단을 기습했던 부대였다. 인민군 1사단은 가산-왜관 사이에서 인민군3, 13사단과 함께 한미혼성1군단의 포위공 격을 받고 괴멸적 타격을받았다.
 
 적 3사단도 포천-의정부 축선을 따라 서울로 들어왔던 부대였으니 국군은 3개월 만에 빚을 갚은 셈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배후가 차단되어 가고 있었던 인민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질서 있는 후퇴를 했던' 국군과는 달리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집단적으로 투항하기 시작했다. 포로가 너무 많이 생겨 진격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전진한다'는 군가는 유행 가가 되었다.
 
 박정희는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중령으로 진급했다. 만 주군관학교 동기인 이한림은 당시 준장으로서 부군단장이었고 육사2기 동기생들은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동료들에 비해서 많은 나이와 낮 은 계급은 현실에 대한 박정희의 불만을 구조화했다. 그가 해방 뒤 일 찍 귀국하여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쾌속승진가도를 달렸더라면 혁명 아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산 문현동 부근에 있던 육본은 9월22일 대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전날 박 중령은 영도의 양과자점에서 육영수를 만났다. 송재천 소위는 박정희와 동행했다가 먼저 나왔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약 혼하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박 중령은 육본의 대구 이동 수송책임자가 되어 부산진역에서 체제의 편성을 지휘했다. 완전군장을 한 박정희 중령의 모습을 처음 본 송재천은 절도있고 명쾌한 지휘통솔에 감탄했 다.
 
 한편으로는 저런 분이 북진대열에서 멀리 처져있다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이혼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 이경령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송재천이 이모뻘 되는 이경령에게 귀 띔을 했던 것이다. 이경령은 둘째딸의 사주를 들고 점을 보러 갔는데 '따님은 재혼하는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경령은 남편 육종관에게는 박정희의 혼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 았다. 그러지 않아도 육종관은 박정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군인에게 영수를 시집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이경령은 한때 소실을 다섯 명이나 거느린 적이 있는 남편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이미 영수도 마음속으로 결정한 것 같으니 성사시켜줍시다.'.
 
 육종관은 항상 자신의 말을 잘 듣던 딸이 이 중대사에 있어서는 자 기 주장을 확실히 하는 데 오히려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섭섭하기가 이를데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대구로 올라와 태평로에 하숙을 정했 다. 서울이 수복되면 육본도 서울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미 전방지휘 소를 서울에 설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박정희의 마음이 바빠졌다. 그는 송재천 소위에게 트럭을 한 대 주어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육종 관의 가족들을 옥천으로 태워보내는 길에 대구로 모시고 와서 약혼식 을 올리기로 했다. 이경령은 약혼식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다시 한번 남편을 설득하려 했다. 육종관은 '너네 마음대로 해!'라고 쏘아붙였다.
 
 육종관 일가를 태운 트럭이 대구를 지날 때 이경령은 다른 이유를 댄 뒤 딸을 데리고 내렸다. 남편만 옥천으로 가게 했다. 소실을 다섯 명이나 데리고 들어와도 불평 한마디 못했던 이경령으로서는 남편 몰 래 딸을 약혼식장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 일생일대의 결단이었을 것 이다. 모녀는 대구 동성로 네거리 자유백화점 옆 일식당 삼화식당으로 갔다.
 
 그 시간 박정희는 전투정보과 사무실에서 이영근 중위에게 '나 하고 식사나 하러 갈까'라고 말을 건넨다. 다른 과원들은 점심 먹으러 나가고 없었다. 이영근은 영문도 모르고 지프에 올랐다. 식당 방에 들 어가니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가 할머니와 앉아 있었다'는 것 이다. 이 약혼식장에는 방첩부대장 한웅진 중령이 우인대표로 나왔다. 식사하는 걸로 약혼식은 끝났다. 모녀는 옥천으로 돌아가고 며칠 뒤 박정희는 육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계속).
 
 (조갑제 출판부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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