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 벗는 뒷모습이 든든했습니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만남을 중계한 것은 전란이었다. 충북 옥천부자 육종관이 솔가하여 부산으로 피란와서 영도에서 일본식 2층집에 세들 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8월하순이었다.
박정희 소령은 송재천 소위의 안내를 받아 육영수의 집으로 찾아갔 다. 맞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박(박)소령은 육영수가 어딘가에서 자신 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방문 앞에서 군화 끈을 풀고 있었다.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 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에요. 얼굴보다 뒷 모습이 정직하거든요.'.
영부인 시절 육영수가 한 말이다. 박정희는 육종관- 이경령 앞에 앉고 육영수는 찻잔을 나른 뒤 부모 옆에 단정히 앉았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고 있었다. 육종관과 박정희가 주로 이야기를 나누 었지만 수인사에 불과했다. 얼마 후 박정희가 자리를 떴다. 자기방으로 돌아온 언니에게 동생 예수가 물었다.
'언니, 어때요?'.
육영수는 달아오른 볼을 싸 안으며 생글거리기만 했다. 표정은 밝았 다.
'언니, 웃는 것 보니 마음에 들었나 봐.' '글쎄, 눈이 번쩍 번쩍 광채가 나는데 굉장히 무서웠어. 콧날이 날 카로워 성깔이 있어 뵈더구나. 그러나 주관이 확고하게 서 있는 듯한 그 눈에 마음이 끌려.'.
이날 밤 송재천도 육영수에게 찾아가서 물었다고 한다.
'사람은 체격도 작고 볼품이 없지만 마음이 아주 단단한 것 같고 돌 아서는 뒷모습이 아주 좋던데요.'.
부끄럼을 타는 천성을 가진 박정희는 맞선을 보러 갈 때 떨리는 가 슴을 진정시키키 위해서 소주를 몇 잔 마시고 갔다고 한다(당시 전투정 보과 한무협 대위 증언). 송재천은 박정희 과장에게도 맞선 본 소감을 물었더니 싫다는 내색도 좋다는 표현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박정희 는 만만한사이인 김재춘 소령에게는 이런 말을 했다.
'뭐, 키가 나보다 큰 것 같고, 뭐 보기는 봤는데 다시 만나봐야지.'.
김재춘은 속으로 '이 양반이 까다로운 데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 혼담이 오고가고 있을 때 전황은 벼랑으로 치닫고 있었다. 인민군은 8월31일부터 최후의 총공세를 낙동강-부산 교 두보의 전전선에 걸쳐 감행한다. 김천에 전선사령부(사령관 김책 대장, 참모장 강건 중장)를 둔 인민군은 약9만8천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방 어에나선 유엔군(한국군과 미군이 주력)은 병력이 17만6천 명으로서 약 두배, 전차는 6백 대로서 인민군의 여섯 배였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유 엔군이 잡고 있었다.
인민군은 병력과 화기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 고 6·25기습으로 선점한 전장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기습이 중요한 것은 주도권을 잡기 때문인데, 주도권이란 결전의 시기와 장소를 선택 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인민군의 총공세가 절정에 달한 9월3일 밤 국 군과 미군은 대구포기를 심각하게 검토할 정도로 몰리고 있었다. 경주, 영천은 함락직전이었고 대구 북쪽의 요충지 가산과 다부동은 인민군에 게 넘어갔다. 창령전선은 돌파되었고 마산전선에서는 혼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9월4일 워커 미8군사령관은 일선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대구-포항 선을 포기하고 밀양선으로 후퇴하는 문제를 토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 했다. 워싱턴의 펜타곤과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유엔군이 현전선 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9월5일 미군은 하룻 동안에 1천2백45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4일 워커 사령관은 대구에 남아 있던 국방부, 육본, 내무부를 부산 으로 철수하도록 권고했다. 내무장관 조병옥은 워커 장군을 찾아가 반 론을 폈다.
'지금 우리 경찰까지도 군에 배속되어 북쪽 전선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데 내무부가 철수한다면 경찰은 물론이고 대구시민들도 일대 혼란 에 빠질 것이오. 내무부만은 남아서 경찰로써 대구를 사수하겠소.'.
5일 밤 그때까지 진해에 가 있던 이승만 대통령도 대구에 올라왔다. 노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을 불러놓고 꾸짖었다.
'나보고는 진해에 가 계십시오, 그래 놓고서 대구 철수가 무슨 소리 야. 나는 이곳에서 동포들과 같이 있겠어. 다시는 진해로 안 갈 거야.'.
전세는 이런 고집을 허용하지 않았다. 국방부, 육본, 미8군사령부는 다음날 부산으로 이동하고 내무부만 대구에 남았다. 부산에서는 유엔군 이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9월3일 부터 낙동강 전선에서는 비가 내렸다. 피로 물든 산하를 씻어내는 비였 지만 한미공군이 근접지원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박정희의 전투정 보과는 6일 새벽 영천이 적15사단에 의해 함락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 다. 적은 여세를 몰아 대구나 경주로 진출할 것이다. 이날 오후 이성가 장군의 8사단이 일시 영천을 탈환했으나 적15사단의 주력이 12대의 전 차를 앞세우고 시내로 들어오자 물러나야 했다. 8일 영천을 다시 잃은 날 워커 8군 사령관이 정일권 육군총참모장 겸 3군총사령관을 찾아왔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비밀로 해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군 중에서 믿을 만한 2개 사단, 그리고 저명인사 10만 명의 명 단을 준비해주시오. 그 명단에는 반공단체와 경찰 간부들을 포함시켜주 길 바랍니다.'.
영천전선을 돌파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없을 때의 철수 대비 책이었다. 부산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으로부터 보고를 받자 격하게 말했다.
'나더러 겨레를 이끌고 다시 조국을 떠나라고…. 워커에게 말하시오. 가려거든 가라고.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든지 권총이 준비되어 있다 고 말하시오. 좀 위태롭다 해서 떠나고싶으면 저희들끼리만 떠나라고 하시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