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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 장부정리-편지대필 도맡아
 영수, 장부정리-편지대필 도맡아
 
 옥천 부자 육종관은 가난한 소작농 출신인 박정희와는 여러 모로 문화적인 갈등을 겪을 만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용적인 면에 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육종관은 이재에 밝을 뿐 아니라 기계를 다루 는 데는 호기심과 재능이 많았다. 일제 시대에 벌써 포드 T형 승용차, 트럭, 시보레 승용차, 사이드 카(오토바이)를 갖고 있었다.
 
 마방을 고쳐 차고로 썼고 운전을 직접 했다. 조수가 있어도 자동차가 아까워 운전대를 맡기지 않았다. 자동차가 구덩이에 빠질 때나 타이어에 바 람을 넣을때 조수가 소용될 뿐이었다. 조수가 운전석 옆에서 주인처 럼 타고다니는 판이었다. 사진기뿐 아니라 촬영기까지 가지고 다니면 서 누에치는 모습을 찍어 집안 식구들에게 상영해주곤 했다. 고물상 에서 기계부속품들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 수리하고 기름칠하여 조립 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는 대단한 수집벽이 있었다. 여자까지도 수집대상으로 삼은 셈 이다. 서울의 소실집에 살 때는 사발시계와 궤종시계를 수집하기 시 작했다. 몇달 안가서 그의 방은 고물시계 천지로 변했다. 온 집안에 째깍거리는 소리가 가득해 식구들은 정신이 멍멍하여 잠을 못이룰 정 도였다. 한때는 총기류 수집에 빠졌다. 브라우닝, 윈체스터 등 엽총 30여정, 권총 10여 정을 수집해 놓고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자랑하곤 했다. 경찰서장이 새로 부임해올 때마다 명품을 슬쩍 보여주면서 마 음에 드는 것을 물어본 다음 조만간에 선물할 뜻을 내비치곤 했다.그 때부터 서장은 수시로 이 집을 드나들게 되는데 육종관은 인허가 문 제나 송사를 청탁하곤 했다. 그는 아들 육인수한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세무서장과 경찰서장한테는 돈을 많이 줘야 한다. 군수한테는 적 게 줘도 돼. 힘이 없거든'.
 
 군인을 싫어한 육종관이었지만 총기류에 대한 호기심은 6·25동란 중 재차 발동되었다. 동네 꼬마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야산에 버려진 총기들과 총포탄을 주어오게 하였다. M-1소총, 카빈, 따발총이 그의 창고를 메우기 시작했다. 육종관은 개머리판이 없는 총은 나무로 깎 아 새로 붙였다. 그런 다음에는 공터에서 시험사격을 했다. 그리고는 기름종이로 한 정씩 정성들여 싼 다음에는 다락방에 올려놓는 것이었 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육종관이 새로운 수집대상을 찾아 나서는 그 순간부터 과거의 명품에서는 정을 떼는 것이었다. 육종관이 특별 히 친일적 행동을 했다는 증언은 없다.
 
 그런데도 일인 경찰서장들이 그에게 부임인사를 올 정도가 된 것 은 그의 큰 형(육종윤)이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여 살면서 일본의 정객들과 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부임하는 총독에 게 동생부탁을 할 정도의 교분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말 총독부에서는 충북 영동지방에 전기를 가설하고 있었 다. 옥천은 역 부근에만 전기를 가설하도록 되었다. 육종관은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전기를 끌어와야 한다면서 뛰어다녔으나 잘 되 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한 그는 6km쯤 떨어진 오리티 강에 작은 수력발전소 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오사카에서 발전기 제작소 사람들을 불러 현 지 답사를 시키는 것을 본 총독부에서 손을 들었다. 전신주를 세우는 경비는 육종관이 부담하기로 하고 교동마을까지 전기를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육영수의 어린시절 교동 집에는 백 개나 되는 전등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리에는 그보다 40여년이 흐른 1970년대초에 전기가 들어갔다.
 
 육종관은 집안을 왕국처럼 그리고 회사처럼 운영했다. 그는 소실 들을 데려다 놓고 놀고 먹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4백석을 생산하는 논밭 일을 하는 데 소실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다. 그 자신도 농사일에 참여했다. 장부정리는 육영수의 몫이었다. 보통학교 상급반 시절부터 육영수는 아버지한테 불려가서 장부정리, 편지대필, 헌 돈 다리미질, 고물상에서 가져온 헌 부속품에 기름칠하기 등등의 심부름을 했다. 육종관은 편지에 '부디'라는 부사를 남발하는 특징이 있었다.
 
 육영수가 '아버지 '부디'가 또 나와요'라고 하면 육종관은 '그냥 받아 써'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육영수는 18명이나 되는 육종관의 자녀들 가운데 아버지의 총애와 신뢰를 독차지하는 아이가 되었다. 아버지의 보좌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어린시절 육영수는 차분하고 침착하며 자존심이 강했다. 네 살 아래인 육예수는 활달하 고 상하를 막론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아이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언니- .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밥을 먹었어도 우리 둘은 성격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어요. 언니는 이지적이면서도 인정이 있었지만 상대방 이 무슨 사정이 생겨 약속을 어기거나 하면 탁 돌아서 버리는 성격이 었습니다. 저는 아버지한테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쓰곤 했는데 언 니는 그런 약한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고 그 나이에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러니 아버지도 언니를 어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각기 어머니가 다른 10여명의 아이들과 섞여 살면서 육영수는 다 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분수와 품위와 영역 을 지키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영부인 시절, 항상 칼날처럼 긴장된 정신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기지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던 육영수의 품행은 이 경쟁사회에서 단련된 것이었다. 1970년대초 부산의 국민학 생들로 조직된 '어깨동무 합창단'이 청와대를 찾았을 때였다. 육영수 는 일일이 학생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한 학생이 자신의 이름과 교명 을 댄 뒤 느닺없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 교장 선생님은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찬성하시고 열심히 참여 하고 계십니다'.
 
 육영수는 고개를 약간 돌리더니 학생들을 안내해온 고모 아들 송 재관(당시 어린이 회관 전무)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글쎄 교장선생님이 저렇게 외워보내면 어떻게 해. 무슨 교육이 되겠어'.
 
 육영수의 고개가 학생쪽으로 돌아갔을 때 표정은 싹 바뀌었다.
 
 '돌아가거든 교장선생님께 나한테 말씀드렸다고 꼭 전해요. 알았 지요'.
 
 이 상냥한 영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교장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성장한 육영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과 표정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데 거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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