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개입 가능성 트루먼엔 숨겨라'
국군 3사단을 선두로 하여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북한으로 진격 해들어감으로써 한국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유엔군에 부여한 최초의 임무는 '침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 아냄으로써 평화와 군사분계선을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인천 상륙 직 전 트루먼 대통령은유엔군의 당초 임무를 수정하여 '인민군을 38선 북 쪽으로 밀어내든지 북한정권의 군사력을 무력화시킬 것'을 맥아더에 지 시했다. 해석에 따라서는 38선 이북으로 진출하여 인민군을 철저히 궤 멸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워싱턴의 우려와 비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고집했던 인천상륙 작전이 예상을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자 전략목표의 설정에 대한 주도권 과 해석권이 일시적으로 맥아더에게 넘어갔다.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엄 청난지지를 받게 된 '미국의 시저' 맥아더한테 트루먼 행정부와 합참은 끌려다니게 되었다. 이런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미군의 참전 목표는 저 절로 북한 인민군의 완전한 붕괴와 김일성의 항복, 그리고 한반도 통일 로 확대된 것이다.
맥아더가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은거의 없었다. 스탈린도 김일성에게 중국으로 도망가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도록 권고할 정도였다. 폭풍처럼 북진하는 유엔군 앞에서 인민군은 사실상 저항을 포기하였다. 대부분의 전투는 총격전이 아니라 행군이었다. 중공군이 개입하더라도 기울어진 대세를 돌려놓기에는 너 무 늦었다는 분석이 압도적이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군사적 천재로 꼽히는 마오쩌둥(모택동)은 인 민군이 기습에 성공하여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벌써 준비를 시작했다. 1950년 7월13일 마오쩌둥은 하남, 광동, 광서 등지에 배치되어 있던 제 13병단(한국군의 야전군 규모로서 병력은 12만∼13만명)을 중심으로 하 여동 북변방군을 조직하고 만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8월 중순에는 약 25만명의 병력이 만주에 집결하여 훈련에 들어가고 속속 증원군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8월 중순 인민군의 공세가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되자 마오쩌둥은 동북군에 대해서 오는 9월30일까지 출동준비를 끝내도 록 지시했다. 이런 대비를 해놓고 중국은 미국측에 경고하기 시작한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하기 하루 전, 저오언라이(주은래) 총리는 '맥아더 의 북진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고 방송했다. 10월1일 맥아더로부터 '항복하라'는 최후 통첩을 받은 김일성은 외무상 박헌영과 함께 마오쩌 둥에게 지원군 파견을 애걸하는 긴급전문을 보냈다.
기습남침을 위하여 소련을 끌어들임으로써 한반도를 떴던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김일성은 망할 지경이 되자 이번에는 중공군까지 초대하여 한반도를 국제전쟁판 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동포의 공동선과는 아무 관 계없는 일당의 이익을 위하여 외세를 불러들여 조국의 산하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민족사상 최악의 사대주의인 것이다. 이런 그가 이른바 주체사상을 들고 나온 것은 자신의 본질을 기만하기 위한 위장 술에 다름 아니다.
10월3일 저오언라이는 주 중국 인도대사 패니컬을 밤중에 불러 '만 약미군이 북진하면 중공군은 인민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출동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만 북진하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패니컬 대 사는 이 메시지를 미국측에 전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패니컬을 신용 하지않았다. 인도 대사를 중공의 심부름꾼 정도로 과소평가하고 묵살했 다. 마오쩌둥은 10월2일 오후 주더(주덕), 저오언라이(주은래), 류샤오 치(유소기), 가오강(고강) 등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고 참전 문제를 논 의하기 시작했다. 많은 간부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미군에 비해 장비가 절대적으로 열세하고 공군의 엄호를 받을 수 없으며 이제 막 내전을 끝 내고 국가건설을 시작한 마당에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란 것이 반론의 요지였다. 마오쩌둥이 지원군의 총사령관으로 점찍어놓고 있던 린뱌오 (임표)도 아프다면서 반대 뜻을 전해왔다. 이런 반론을 누르고 마오쩌 둥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명분으로 참전을 결심하고 총사령관에 는 텅더화이(팽덕회)를 임명했다.
마오쩌둥은 텅더화이에게 아들 마오안잉(모안영)을 데려가도록 명 령했다.
텅더화이는 중국내전 중에 마오쩌둥의 처와 아들이 피살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양했지만 마오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데려가게 된다(나중에 북한에서 전사). 마오쩌둥은 압록강을 넘는 날을 10월15일 로 잡았다. 그리고는 저오언라이 총리는 소련으로 보내 공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이때 겁을 먹고 있었다. 미국이 소련과 정면 대결 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중공군 20개 사단의 장비를 제공할 용의는 있지만 공군의 지원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뒤로 빠져버리는 것 이었다. 이 배신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불면의 고민을 한 끝에 참전 강행을 결단한다. 압록강 도강은 10월18일, 제1파는 25만, 제2파는 15 만, 제3파는 20만 총60만의 대군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전투기와 탱크 는 한 대도 없고, 소총과 방망이 수류탄마저 한 명에 하나씩 돌아갈까 말까한 중공군은 그러나 혁명적 열정과 엄정한 군기로 똘똘 뭉쳐서 육 해공의 최신무기로 철갑을 두른 유엔군을 향하여 나아갈 참이었다.10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와 만나 한반도 전략을 의논하고 싶 다고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타진한다. 맥아더는 태평양상의 웨이크섬 에서 만나자고 제의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체 거리의 3분의 2, 맥아 더는 3분의 1을 날아가게 되어 있는 거리였다. 맥아더는 사실상 '나는 바쁘니까 만나고 싶으면 이리로 오시오'라고 한 셈이다.
솔직담백한 성 격의 트루만은 주변의 불평을 누르고 부하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너가기 로 한다. 회담의 주제는 중공군의 참전여부에 대한 논의가 될 터였다. 이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대 통령이 보여준 이 편지를 읽어보았다는 정일권 육군총참모장의 기억에 따르면 요지는 이러했다('정일권회고록').
<본직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 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써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으니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에 대한 맥아더의 답장도 보았다고 한다.
그가 기억한, 10월12일자 맥아더의 답장 요지는 엄청난 내용을 담 고 있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