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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26만 매복 모른 채 전속진격
 중공군 26만 매복 모른 채 전속진격
 
 38선을 10월1일에 돌파하여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1군단(군 단장 김백일)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은 17일에 벌써 함흥을 점령했 다. 수도사단의 선두부대는 이병형대대장이 지휘하는 18연대 1대대였다.
 
 함흥을 점령한 이병형(뒤에 2군사령관, 전쟁기념사업회장 역임) 중령은 시내쪽으로 들어가다가 우연히 쳐다 본 기와집 기둥에 사람이 매달려 있어 다가가보았다. 30세가량의 남자인데 양손에 대못이 박힌 채 죽어 있었다. 반공유격대원들의 안내를 받아 형무소에 갔더니 깊이 가 30m쯤 되는 우물안을 수십 구의 시체가 그득히 메우고 있었다. 유 격대원들은 공산당이 학살한 애국인사들이 한 군데 더 있다고 했다.
 
 산 중의 일제 시대 방공호에 그들을 몰아넣고 폭파시켜버렸다는 것이다. 공산당과 인민군은 철수할 때 우물과 광산을 집단학살 장소로 애용했 다. 그들은 대전형무소에서 철수할 때는 6천8백31명의 수감자들을 주 로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때려죽인 뒤 일부를 다섯 개의 우물에 쳐넣었 다(유일한 생존자 이갑산이 취사당번을 하면서 기억한 급식인원숫자). 북진과정에서 이런 학살을 목격한 국군이 흥분하여 북한지역에서도 좌 익들에 대한 상당한 보복이 있었다.
 
 흔히 동족상잔이라고 말하지만 '증오의 과학'으로 무장한 공산주 의자들이 먼저 일으킨 동족학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남한측의 복수와 응징이 따랐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함흥 점령 다음날 평양은 국군1사단(사단장 백선엽)과 7사단(사단 장 신상철)의 8연대(연대장 김용주)에 의하여 거의 동시에 점령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만은 반드시 국군이 점령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이 미군에 의해서 수복된 데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노대통령은 평 양을 우리가 점령해야 북한지역에 대한 행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 을 것이라고 보았다. 백선엽 장군은 한미1군단이 평양공략에 미제 1기 갑사단을 주력으로, 24사단을 조공으로 배치하자 밀번 군단장에게 건 의하여 국군1사단을 조공으로 교체하도록 한 뒤 제1기 갑사단보다도 2분 먼저 대동강에 도달했다.
 
 유재흥 2군단장도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7사단을 평양으로 돌려 서평양의 도심부를 선점했다. 미군은 그러나 평양을 유엔군 군정지역으로 선포하여 우리 행정요원들이 들어가지못 하게 했다. 앞으로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일이 있을경우 한국군 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진 주한미군사령관이 군정을 또 요구할 것인 지는 큰 쟁점으로 남아 있다.
 
 평양 점령 직후 정일권 3군총사령관은 강문봉작전국장이 제의한 '김일성 생포작전'을 명령했다. 이 작전은 김일성 일파가 재빨리 평양 을 탈출하여 산길로 달아남으로써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대신 김 일성이 버리고 간 전용차를 발견했고 김일성 호위대의 한 장교가 귀순 해왔다. 이 장교에 대한 신문서가 정일권 총장에게 전달되었다.
 
 <질문: 김일성이 평양에서 도망친 것은 언제인가. 답: 10월16일 밤중이었다. 질문: 가족도 함께였나. 답: 아니다. 아들 김정일과 가족 들은 10월10일에 이미 만주의 장춘으로 피란시켰다. 질문: 김일성은 어디로 향했나. 답: 강계로 갔다. 거기에 가면 중공군을 만나게 된다 고했다. 질문: 강계에 중공군이 와 있다는 것인가. 답: 그 소문은 파 다했다. 인민군은 끝장났다고 하면서도 중공군이 와서 구해줄 것이라 고 믿었다. 질문: 그게 언제부터인가. 답: 38선 너머로 도망쳐 올 때 부터였다.>.
 
 정일권 총장이 이 보고서를 읽어본 것은 10월24일. 그는 장도영정 보국장을 불러 '중공군이 와 있다'는 첩보의 확인을 지시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10월24일 맥아더는 서부전선의 미8군과 동해안의 10군단에 대해서 '모든병력을 총동원하여 압록강을 향해서 전속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만국경지역으로의 진격은 한국군에 맡 겨라'는 워싱턴의 종전 지시를 맥아더는 무시했다.
 
 미합참은 인기절정 의 전쟁영웅을 상대로 감히 따지지는 못하고 '이 진격명령의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할 뿐이었다. 맥아더는 '웨이크 섬에서 대통령과 이 문제를 이미 논의한 바가 있다'고 답신했다. 더 물어볼 것이 있으 면 대통령에게 알아보라는 식이었다. 며칠 뒤 트루먼이 '압록강에는 한국군이 접근할 것으로 안다'라고 말하자 맥아더는 기자들에게 '유엔 군의 임무는 한국 전체를 평정하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미국방부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가만 있어달라고 자문한다.
 
 링컨이 남북전쟁 때 그란트 장군에게 부여한 재량권의 전통에 따 라 '일단 현지 사령관에게 전략목표를 부여한 이상 그 목표를 어떤 방 식으로 달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과 맥아더의 명성이 트루먼의 혀를 멈추게 했다'고, 맥어더의 전 기('아메리칸 시저')작가 윌리엄 만체스터는 썼다. 트루먼은 한 술 더 떠서 '인민군이 압록강을 건너가 만주땅을 성역으로 숨어드는 것을 허 용하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했다. 1주일 전 압록강을 건너온 26만명의 중공군이 북쪽 산중에 숨어 다가오는 유엔군을 기습하기 위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바로 그때 맥아더는 생애의절정에 있었다.
 
 모택동은 맥아더가 중공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미군에 대해서 훨 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중국측의 공간사에 따르면 10월21일 모택동 은 유엔군의 급속한 북진에서 허점을 발견, 북한에 들어가 있던 팽덕 회에게 전문을 보내 '동부전선은 방어에 전념하고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 한국군 3개 사단을 섬멸하라'고 명령한다.
 
 유엔군의 허점은 지 휘권의 2원화와 분산진격이었다. 서부 전선은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미8군이, 동부전선에선 알몬드 중장이 지휘하는 10군단이 각개 북진하 고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주인공인 10군단은 해병을 주력으로 한 약 10만 대군. 맥아더는 서울 수복 직후 10군단을 8군과 합류시키지 않고 인천에서 배에 태워 원산으로 보냈다. 원산만의 기뢰제거에 시간 이 걸려 10군단은10월 하순에야 동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근 한달간을 이동에 허비하고 말았다. 총병력 약 20만의 두 주력군, 8군과 10군단 사이엔 개마고원과 낭림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큰 자연적 장애물을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 끼여 있는 이 산악지대는 무인지경으 로 방치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바로이 허점을 간파했다. 그들은 이 중 앙 산악지대에 숨어들어 북진하는 양군을 동시에 타격할 수 있는 전략 지점을 선점한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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