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장 교체 잦아 `박중령 체제'
전 2군사령관 이병형 장군은 수도사단 18연대 1대대장으로 북진대열의 선두에 서서 올라가면서도 늘 '왜 한국전이 일어났는가'란 화두를 머리 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인민군 남침 이튿날인 6월26일 의정부 전선에 벌써 미군기가 나타나 적을 공격하는 신속성을 보고 의문을 가졌 다. 그는 명저 '대대장'에서 이런 요지로 썼다.
〈아시아에서 불고 있는 공산화의 불길을 끄려면 어딘가에 물구덩이를 파야 했다. 정치권은 경제권과 같은 의미일 것이고 15억의 아시아는 너무 큰 시장이다. 미국의 극동및 아시아 방위선이 변경되었다. 한국과 대만이 아시아 최전선에서 제외되고 한미군사원조협정이 1950년1월에 체결되었다. 물구덩이는 비밀리에 파였다. 표면은 위장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메마른 땅에서도 메마른 풀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불길이 조금씩 보였다. 북극곰과 그 졸개들이 군침을 삼켰다. 불길에 덴 짐승한테 이들은 날쌔게 덮쳤다. 그러다가 38선에 파놓은 물구덩이에 빠지고 만 것이다.〉.
'아시아의 시저'란 자의식이 있었던 맥아더는 중국의 공산화를 미국이 막지 못했다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의회와 군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울분을 이용하는 한편, 대만의 장개석-한국의 이승만-일본의 요시다 정권 을 잇는 반중공보루를 강화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은 확실 하다. 맥아더는 장개석이 제의한 대만군 3만 명의 한국전 파견안을 관철 시키려고 워싱턴 당국을 끈질기게 설득하기도 했다.
인민군 남침과 중공 군 개입은 맥아더에게 대반격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트루먼 행 정부는 맥아더와 뜻을 같이 하면서도 유럽방어를 우선해야한다는 영국의 만류와 미군들의 인명손실에 대한 국내여론의 압력을 받아들여 불끄기를 포기하고 38선의 물구덩이를 더깊게 파놓는 식으로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북진이 성공했더라도 그것이 즉각적인 통일을 의미했을지는 의문이다.
파죽지세의 북진중 이승만은 북한수복지역의 관할권을 놓고 미국측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은 유엔을 움직여 북한수복지구는 유엔군의 관할 하에 두며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다고 못을 박았다.이에 따 라 미군은 해주,평양 등지의 시장을 미국인으로 임명했다. 이승만 대통령 은 원산을 방문할 때 미10군단장 알몬드 중장에게 서면허가서를 요청해야 했다.
10월24일 이승만은 약2백 명의 경찰병력을 수복된 평양으로 들여보내 려고 했으나 미군에 의하여 저지당했다. 이승만은 북한지역에 미국이 군 정을 실시하면서 남한에서 했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강력하 게 반발했다. 그는, 미군이 점령지에서 공산당을 허용하고 반 이승만세력 에게 이용당할 뿐 아니라 소련에게 양보함으로써 피로써 되찾은 북한을 다시 내주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유엔군이 북한을 해방했다고 하더라 도 미국은 이 지역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발언권을 받아들임으로써 남 한 정부와 대치되는 또 다른 정권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미군이 한국전에 서 흘린 피는 결코 공짜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한국이 나라를 구하기 위 하여 강대국에 진 빚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자주성을 제약하는 식으로 상 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천강 북쪽 운산에서 압록강을 향해서 북진중이던 국군1사단이 중공 군의 기습을 받고 있던 10월25일 9사단이 서울시내 청계국민학교에서 창 설식을 가졌다. 그 이전에 이미 초대 사단장으로는 장도영 정보국장,참모 장에는 사단장의 추천에 의해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박정희 중령이 임명되 어 창설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의 거의 모든 병력이 북진 대 열에 참가하여 텅 비게 된 서울이나 후방을 방어할 사단으로 신설된 것이 9사단이었다. 부산에 세워졌던 장교 단기양성소인 종합학교를 갓 졸업한 1백여 명의 소위들이 소대장으로 충원되었다. 기간 하사관과 장교들은 병 원에서 퇴원한 부상자들을 끌어모았다.
일반 병사들은 부산과 대구의 신 병훈련소에서 M-1소총 사격술과 수류탄 투척교육만 10일간 받고 배치되었 다. 약4분의 1은 문맹.무기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전투력이 허약할 수 밖에 없었다. 포병대대가 창설된 것은 두 달 뒤였다. 3개 연대(28,29,30) 를 창설하고 있는 중에 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후방 산중에 남아 낙오된 인민군 패잔병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북상하고 있는데 중부지방이 위협을 받고 있으니 대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었다.
지금의 대전고등학교에 사단사령부가 설치된 직후 장도영 사단장은 일 선으로 불려갔다. 중공군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은 2군단의 6사단을 김종 오 사단장으로부터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9사단 후임사단장으로는 10월31 일자로 김종오 준장이 부임했다가 이틀 뒤 오덕준 준장으로 바뀌었다. 그 뒤로도 1∼3개월 간격으로 사단장이 이성가, 김종갑, 최석준장으로 자주 교체되었다. 자연히 사단사령부는 박정희 참모장 중심으로 운영되었다.참 모진은 인사참모 백남태, 정보참모 최택원, 군수참모 김재춘, 작전참모는 육사2기 출신으로서 박정희의 동기인 손희선 중령이었다.나중에 육군본부 인사 참모부장과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을 지낸 손희선은 '그분은 참모들 을 자상하게 거느리고 사단장에게는 깍듯이 대해 사단 사령부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고 했다. 박정희는 참모들에게 업무의 지침만 내려보내고 세 부적인 방안은 일임했다.
지시한 업무의 처리 결과는 비망록을 갖고 다니 면서 꼼꼼히 챙겨 참모들은 자율 속에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희선은 '나는 작전참모장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재량권이 컸다. 그분의 작전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 내리는 지침대로 하니까 틀림이 없었다. 뒤에 내가 7사단 참모장이 되었을 때는 그분의 방식대로 하려고 했다'고 회고 한다. 참모진 가운데는 정훈부장 이용상 대위도 끼여 있었다. 유진오의 처남인 이 시인은 그 뒤 박정희와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내면서 여러가지 일화를 남긴다.
9사단은 부대 편성이 대충 끝나자 후방의 인민군 패잔병 소탕작전에 나섰다. 28연대(연대장 이창정대령)는 전북 대둔산과 충남지구, 29연대 (연대장 한신대령)는 경북 김천및 왜관지구, 30연대(연대장 고시복대령) 는 경북 상주 영주 문경지구의 평정을 맡았다. 대전에 있는동안 박정희 는 가까운 옥천의 육영수 집으로 자주 내려갔다.육종관 일가가 집을 비운 사이 교동집은 인민군 치하에서 공산당원 강습소로 쓰였다.박정희가 정식 으로 육종관에게 인사를 하려고 교동을 찾은 날 후원원)의 감나무는 빨갛 게 익은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마당에는 낙엽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 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