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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국익위해 파병했을 뿐'
 '그들의 국익위해 파병했을 뿐'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근무하면서 박정희는 6·25남침과 중공군 개입 에 대한 미국측의 정보판단 실패가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가 까이에서 두 번씩이나 지켜볼 수 있었다. 두 번 다 미군측은 한국군측 에서 제기한 인민군 남침 가능성과 중공군 출현 정보를 묵살했다.
 
 그 정보오판의 참담한 결과를 떠안아야 한 것은 국군과 국민들이었고, 자 주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 국가의 운명이자 안보의 무임승차에 따른 대 가였다. 훗날 박정희가 이런 미국측의 오판이 사실은 맥아더가 중국 본 토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한 함정이자 유인동작이었다는 인식을 갖 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박정희의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이 단순하지만은 않았음을 엿보게 하는 흔적은 있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그가 쓴 '국가와 혁명과 나'는 미국에도 민족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과 월남의 분단은 패전과 내란의 산물이었지만 한반도 분단은 순수하게 미소의 편의에 따 른 것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에 시달렸고, 또 임정이 연합국 편에 서서 투쟁한 교전국가가 아니었던가'. 그는 또 미국이 6·25동란에 참전한 것도 '단순히 한국의 방위만을 위한 것이었 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평화 와 태평양지구방위정책에 직결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한국동란에서 남한이 유린되었다면 당장 일본이 위태로워졌을 것이 고, 소련 잠수함은 오키나와를 위협하고, 미국의 서부 방위선은 샌프란 시스코 연안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미양국간의 관계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결과된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의 역할을 내세워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논리를 확대했다. 요컨대 박정희는 '우방 미국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려 한국을 구출해 주었다'는 단순논리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 구세주론'으로 국내정치에 간섭하려 하는 자세 에 반발한 것이다.
 
 남한국민은 '맥아더의 대모략에 걸려든 김일성의 소모략으로 발생한 참화의 일방적 희생자'란 시각도 있다. 일본 공산당기관지 아카하다의 평양특파원을 지내면서 김일성에 절망했던 하기하라 료(추원료)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6·25동란중 미군이 노획한 북한문서 1백60만 페이지를 2년 반 동안 통람하고난 뒤 '조선전쟁- 김일성과 맥아더의 음 모'란 책을 썼다(1994년 일본 문예춘추 발간). 북한측의 자료를 가지고 6·25 남침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북침설을 근본에서부터 붕괴시킨 이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단정했다.
 
 '김일성이 은밀하게 진행시켰던 조선전쟁의 음모는 맥아더의 극동미 군에 의하여 1년 전부터 일일이 포착되어 그들의 대모략에 완전 이용되 었다. 조선전쟁은 김일성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대 장 정도의 경력과 안목밖에 없는 김일성을 '천재적 군사전략가'라고 추 켜세웠던 소련, 무력통일을 응원한 중국, 김일성의 망동, 미군의 개입 이 평화스러운 조선을 지옥으로 바꾸어놓은 원흉이었다'.
 
 맥아더 극동사령부는 1949년6월 서울에 KLO(Korean Liaison Office) 라고 약칭한 한국연락사무소를 개설했다. 이 첩보기관은 북한 정부기관 과 산업시설에 많은 첩보원들을 들여보냈다. 1950년6월24일까지 이 첩 보원들이 보고해온 정보보고는 1천1백95건이었다.
 
 이 문건으로 미루어 북한에서 활약한 맥아더 사령부 직속 첩보원의 숫자는 백 명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보고에는 중공군에 있던 조선족 장병들의 대거 입북과정, 각 사단 및 전투비행장의 구조와 구성, 김일성의 비밀연설등 전쟁준비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1950년3월15일에 'SAN93호'란 암호 명의 첩보원이 보낸, 인민군 대대장급지휘관 3백60명을 모아놓고 한 김 일성의 연설문 요지는 사실상 남침선언이었다.
 
 '1949년에는 북조선을 방위하는 데 주력했지만 올해는 조국을 통일 하기 위한 영웅적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38선상에서 여러 사건들을 일으켜 남조선군의 관심을 그곳으로 돌린 다 음 우리 유격대는 후방에서 괴뢰군을 공격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조 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모든 보고는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 앞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윌로비는 1951년 코스모폴리탄지에 기고한 글에서 '1950년 3월 맥아더 사령부는 북한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 했다. 그러나 그는 워싱턴에 대해서는 '올해 봄이나 여름에 남침 가능 성은 없다'고 보고했다.
 
 백령도에 본부를 두고 중공군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맥아더 사령부 캐논기관의 기관원 연정은 1950년 10월이후 중공군의 개입에 유 엔군이 패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 한국해군 소 령출신인 그는 한국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 윌로비 소장과 재회했을 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수집하여 보낸 정보들은 맥아더에게 전달됐는 가.' '물론이다. 나는 맥아더와 국무성에 그 정보를 전달했지만 그런 꼴 을 당하고 말았다. 내가 맥아더를 따돌리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직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연정은 자신의 회고록 '캐논기관으로부터의 증언'에서 '맥아더가 그 정보를 애써 무시한 것은 만주를 공략하고싶었기 때문일 것이다'고 썼 다. '전략적으로 볼 때 만주를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자유진영에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출현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거에 만주로 북상하고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군 인이라고 일컬어지던 맥아더도 결국은 정치가에게 당하고 만다. 군인은 이기는 길만 생각하는데 정치인은 세론을 따르기 때문이다.'.
 
 좌파들이 주장하는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은 이미 낡은 학설이 되어 버렸다. 최근 들어 정일권, 연정 같은 우익인사들이 주장한 것은 '남침 방치설'이라 불릴 만하다. 이 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맥아더의 두 가지 실수 6·25기습과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을 설명해줄 수 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과 중국의 공산화로 유라시아 대륙이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한 합법적 군사개입의 명분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했 고 바로 이때 '맹동분자' 김일성이 한민족을 함정으로 끌고들어갔다는 해석이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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