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인천상륙작전 후 첫 후퇴령
서부전선에서 북진의 주력은 미8군의 제1군단이었고 선봉부대는 백 선엽 준장이 지휘하는 국군1사단이었다. 1사단은 6·25기습 때도 선전 했고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격전지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평양돌입에서는 선착부대가 되었다. 백사단장은 청천강을 넘어 금광으 로 유명한 운산으로 진입하면서부터 불길한 예감을 감출 수 없었다.기 온은 급강하하여 아직 하복을 입고 있던 장병들은 추위를 타기 시작했 다. 지형도 바뀌어 날카로운 봉우리와 깊은 계곡속으로 진격부대는 빨 려들기 시작했다. 운산은 꽤 큰 도시였는데 인적이 보이질 않았다.
10월25일 중공군은 드디어 매복지에서 뛰쳐나와 전력이 미군에 비 해 약한 듯 보이는 국군 선봉부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군1사단 과 2군단(군단장 유재흥)소속 3개 사단이 표적이 되었다. 이들은 배후 가 차단되고 옆구리를 찔리고 정면을 돌파당했다. 배후와 측면을 치는 전역우회, 인해전술에 의한 정면돌파, 신속한 산중행군과 야간기습을 배합한 중공군은 품안에 안겨든 국군을 '독안에 든 쥐'처럼 두들기기 시작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첫날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신문했다. 포로의 진술이 하도 충격적이라 그는 1군단장 밀번 소장을 불러 그가 직접 포로를 신문하도록 했다.
'어디 출생인가.' '중국 남쪽입니다.'.
'어느 부대인가.' '제39군입니다.'.
'전에도 전투해본 적이 있는가.' '해남도에서 싸웠습니다.'.
'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인가.' '아닙니다. 저는 중국인입니다.'.
밀번 소장은 중공군 포로에 대한 신문 내용을 즉시 맥아더 사령부의 윌로비 정보참모부장에게 보고했다. 중공군에 포위 공격을 받은 국군 1사단은 워커 8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15일 인천상륙 작전 이후 40일만에 처음인 후퇴명령이었다. 1사단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하여 미제1기병사단의 8연대가 중공군과 교전하기 시작했 다. 역사상 최초의 미중무력충돌이었다.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8연대 를 공격한 중공군은 조랑말에다가 공용화기와 탄약을 싣고다닐 뿐 자동 차나 전차는 한 대도 없었다. 하룻밤의 산악행군으로 백리 길을 간단하 게 돌파하는 중공군은 산불을 내어 연기와 화염으로써 자신들을 은폐하 기도 했다. 미8연대 3대대는 중공군에 포위되고 통신이 두절되었다. 호 바트 게이 미제1기병사단장은 5연대를 보내 3대대를 구출하도록 지시했 다. 이 5연대도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마비상태에 빠졌다.
게이 사단장 은 더 오래 구조작전을 끌다가는 5연대가 전멸할 위험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3대대를 포기하라고 지시했다. 미군전사상 포위된 부대의 구조 를 포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3대대 장병 8백 명 가운데 6백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전차 17대와 1백5밀리 포 13문과 함께. 백선 엽은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려다가 전멸한 미군 3대대 장병들에 대한 기억은 죽을 때까지 내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만군 장교출신으로서 중공군의 전신인 팔로군과 싸워본 적이 있는 정일권 총장은 워커 미8군사령관과 참모들이 중공군의 출현에 대해 과 소평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워커는 '아직까지는 정규군이 개입 했다는 증거는 없다. 인민군에 들어 있는 팔로군 출신들과 구별이 잘 안된다'고 말하는가 하면 '한국군 지휘관들은 패퇴의 책임을 피하려고 중공군 병력을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정총장의 보고를 받고서 태평스럽게 말했다.
'역시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만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
노대통령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 라고 했다. 맥아더가 2주 전에 보낸 편지대로 원폭을 써서라도 중공군 을 격멸하고 만주를 공격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이 무렵 동해안에서는 수도사단 18연대 1대대(대대장 이병형중령)가 북진대열의 선두에 서 있었다. 함흥 북쪽 개마고원에 올라갔을 때 1대 대는 중공군 취사병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해질 무렵에 도착할 중 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병형 대대장은 중공군 중대가 접 근해올 길목 주변에 중대규모의 병력을 매복시켰다.
'그들의 말소리는 수백m에서도 들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죽음의 그림 자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면서 오니 우리도 다소 긴장 이 풀리는듯 싶었다. 어둠 속에서 중공군들은 4열 종대로 무언가 지껄 이면서 내 앞을 지나서 종대의 선두가 애로의 끝에 도달했다.
나는 신 호탄의 방아쇠를 당겼다. 3백 정의 소총과 수십 정의 자동화기가 일제 히 사격을 개시했다. 수류탄과 조명탄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순 식간에 끝났다. 사거리 30m, 죽은자, 부상자, 엎드린 자의 구별 없이 몽땅 다 쓰러지고 말았다.오랜 시간 긴장하고 기다린 것에 비하여 너무 나 반응이 없어서 무언지 모르게 허탈감마저 느꼈다.'.
맥아더는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이승만에게 보낸 그의 편지) 중공군 의 대병력이 출현하자 일단 이를 과소평가하려고 했다. 그는 워싱턴에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단순한 지원병일 가능성, 둘째는 인민 군에 대한 보급지원 부대일 가능성, 세번째는 압록강 남쪽에 완충지대 를 형성하려고 하는 병력일 가능성'이라고 보고했다.
정예사단(한국군 1사단)이 반신불수 상태에서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국군6사단은 궤 멸적 타격을 입었는 데도 맥아더는 게릴라의 출현 정도로 평가하고 있 었다. 반면 중공군은 미군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그들은 제 1차 충돌 직후의 평가서에서 '미군은 화력은 뛰어나지만 보병의 경우, 겁이 많고 야간작전을 두려워하며 보급선이 차단되면 사기가 떨어지고 배후를 치면 후퇴한다'고 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